<버닝> 이창동 감독, "지금 우리는 벤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8-06-04
글 : 김성훈 | 사진 : 백종헌 |
<버닝> 이창동 감독, "지금 우리는 벤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 참석한 뒤 파리에 잠깐 들러 피에르 르시앙(영화 프로듀서이자 칸영화제 자문위원)의 장례식에 갔다가 입국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인터뷰와 관객과의 대화를 치르고 있는 살인적인 일정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상찬 일색인 칸이나 영화 속 다양한 메타포처럼 반응이 가지각색인 이곳이나 그에게 쉽게 내릴 수 없는,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 것으로 보였다. 분명한 건 그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지금 시대에서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꾼으로서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버닝>을 만들게 된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버닝>을 감독의 전작과 다른 지점에 옮겨놓았다. 영화를 보면서 적어도 이창동 감독의 이 영화에선 시제(時制)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명제대로라면 ‘지금 시대에서 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영화가 극장에 걸려 있는 지금도 유효할 것이다. 긴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에 이창동 감독은 “편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버닝>은 60대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젊은 세대의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많은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작업해왔을 텐데 그들을 쭉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꽤 중층적인 생각이 든다. 기성세대이자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입장에서, 또 영화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상황이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에 함께 답답해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젊은 영화인들이 더 도전적이고 모험적이길 바란다. 모순적이지만 현상적으로 한국 영화산업엔 아직 활력이 있다. 운이 좋으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산업적으로 기회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 힘든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모험과 실험을 독려하기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직접 20대를 겪은 1970년대와는 상황이 많이 다른 셈이다.



=그렇다. 그때는 문제가 분명했고 싸울 대상이 있었다. 쉽지는 않아도 민주화든 무엇이든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물질적으로도 앞으로 내 삶이 나아질 거라는 확신도 가능했다. 지금의 문제는 그 믿음이 없어졌다는 거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편리해졌고, 세련돼졌고, 깔끔해졌다. 그럼에도 개개인의 삶에는, 특히 청년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없다. 그게 이 세계의 미스터리다.



-영화는 종수(유아인)가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이 감독의 자기반영적 생각으로도 읽혔다. 8년 만에 신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화를 찍어야 할까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시>(2010)를 끝내고 난 뒤, 많은 프로젝트를 준비했었고 그중에는 연출부를 꾸려서 프리 프로덕션까지 간 영화도 세편이나 있었다. 모두 마지막 순간에 접었다. 언젠가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당장은 보류하는 게 맞다는 판단에서였다. 아마 <버닝> 속 종수의 고민과 본질적으로 닿아 있겠지. 종수는 작가 지망생으로서 처음 소설을 쓰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작가의 원초적 질문이다. <버닝>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을 나도 다시 시작하게 됐다. 그런 질문에 놓이면 사실 편할 수도 있다. 고민할 게 뭐가 있겠나. 재미있고, 관객이 좋아하고, 나름의 메시지로 작품성도 갖춘 그런 작품을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 매번 ‘이걸 꼭 내가 해야 하나?’ 싶은 본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면서 일종의 병적인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게 내 한계이자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전작을 통틀어 가장 장르에 충실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장르의 컨벤션을 파괴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여러 메타포들을 맥거핀 삼아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킨 채 서사를 전개하되 관객이 기대하는 장르영화의 전형적인 구조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왜 그런 것에 집착하는지는 나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들다. 이제 더이상 세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기존의 관습대로 서사를 받아들이고 기대하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버닝>은 그 위험성을 알고서 시작했다. 스릴러 구조를 따라가면서 장르가 요구하는 텐션과 서스펜스를 가져오되 오히려 그것을 뒤집고 해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장르적인 미스터리 구조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자체의 미스터리와 연결되는 면도 있다.



-지금 시대의 시네마는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과 맞닿는 대답으로도 들린다. 영화는 시간적으로 유독 새벽과 해질녘 배경이 많은 까닭에 제한된 시간에서 촬영하기 수월한 디지털로 찍었다. 첫 디지털영화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필름이냐, 디지털이냐라는 딜레마도 있었을 것 같다.



=현실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름은 더이상 생산도, 현상도 안 되는 상황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의 특성을 처음 실감하며 영화를 찍었다. 필름과 디지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디지털을 선택했을 것 같다. 현실을 화면에 옮기는 방식은 <버닝>에서 영화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영화의 구조 자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식하고 믿는 것과 실재의 것, 누가 범인인가 아닌가 등 계속해서 경계를 다루고 있기에 낮과 밤 사이의 어슴푸레한 시간대가 중요했다. 종수가 예기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플롯이라는 점에서 공간적으로도 인공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다. 의도적인 아름다움을 좇지 않고 그 나름의 미학과 정서에 집중하는 거지. 디지털카메라의 즉흥성이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2014)를 포함해 기획, 제작에 관여했던 작품들을 통해 이미 많은 후배 시나리오작가들과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이번엔 오정미 작가와 함께했는데 둘의 역할 분담은 어땠나.



=오정미 작가는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서 내 수업을 들었는데 이야기가 잘 통했다. 러시아 문학과 영문학, 그중에서도 꽤 골치 아픈 바흐친을 전공한 기본기가 단단한 친구였다. 그동안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 변덕으로 영화가 엎어졌고 그럼에도 계속 옆에 남아줬다. 물론 도망가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웃음) <NHK>에서 처음 영화화 제의가 들어왔을 땐, 다른 젊은 감독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행이 더뎌지면서 오 작가가 먼저 우리가 직접 해보자고 제안했다. <헛간을 태우다> 속에서 그간 우리 두 사람이 지속적으로 해온 고민과 맞닿은 맥락을 발견한 거다. 오 작가 자신이 20대부터 하루키 문학의 세례를 받았던 영향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하루키의 일부 작품만 읽은 까닭에 당시 오정미 작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갖고 있었다. 공동작업을 했지만, <버닝>에서 작가로서의 오리지널리티는 오정미 작가가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원작에 비해 섹슈얼한 부분이 더해진 것 같다. 이를테면 종수가 자위하는 장면이나 종수와 해미(전종서)의 섹스 신이 그렇다.



=일부러 드러내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두 남녀가 만났을 때 성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성(性)이라면 ‘그 성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거치기는 했다. 자위라는 건 요즘 사람들 말로 하자면 일종의 ‘혼섹’이지 않나. 혼자 하는 섹스란 것이 이미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거나 ‘없는 걸 잊어버리는’ 행위다. 종수의 자위는 그의 성적 욕망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장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제로 혼섹이 일상화되어 있는 젊은이의 현실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한편, 몸은 중요했다. 몸 그 자체는 실체니까. 일종의 ‘살아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종수는 파주의 시골 마을에서 아버지가 타던 낡은 트럭을 모는 반면, 벤(스티븐 연)은 서래마을에 살면서 포르셰를 타고 다닌다. 두 남자의 계급 차이가 명확한데, 둘을 상징하는 장치가 약간은 도식적인 인상도 준다. 이것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인가, 아니면 상징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인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선 오히려 계급성을 잘 못 느끼게 된다. 영화를 통해 계급이 보인다고 해서 그걸 도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종수가 파주에 머무르는 건 자기가 원해서 택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현실 공간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단순하게는 송아지 굶기지 않으려고 밥 주러 온 것이고. 대남방송이 들리는 파주가 작위적인 설정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종수는 아버지에게 묶인 채 과거의 덫을 현실로 살고 있는 친구다. 일반화하자면 요즘 청년의 문제는 청년의 책임이 아니다. 윗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거지. 남북 관계도 그렇다. 최근엔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는 그동안 뉴스에서 북한 문제가 나오면 쉽게 채널을 돌리면서 남북 문제가 마치 없는 것처럼 느끼고 살아오지 않았나. 일상에서는 대남 방송이 들리지 않는다. 불행히도, 하필이면 종수는 그 현실에 직접 가 있다. 집 앞에는 종수 자신이 직접 게양한 것도 아닌 태극기가 펄럭인다. 지금 한국 사회의 태극기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이상의 것, 우리 아버지 세대의 방향을 알아차리기 힘든 분노가 담겨 있다. 반면 벤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마당에 서서 “재밌네”라고 말한다. 사실 지금 우리는 벤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계급의 문제는 늘 도처에 있다.



-시나리오에서 종수는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그가 소설을 쓰는 설정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시나리오는 2016년 버전인데, 당시 영화를 준비하다가 <NHK>와 저작권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가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어야 했기 때문에 그 뒤로 1년을 미루게 됐다. 그 1년간, 탄핵과 촛불혁명을 통과했다. 어떤 면에서는 분노가 약간 해소되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그전까지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였다.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애초의 시나리오는 좀더 단순하게 젊은이의 현실에 가깝게 그렸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면서 분노에서 객관화 되었고, 다른 겹들이 반영됐다. 영화 매체와 서사에 대한 생각들이 중의적으로 들어가게 된 거다. 그사이 종수는 자의식이 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을 가지기 위해 질문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한편으론 원작의 화자 캐릭터와 조금 더 가까워진 측면도 있다. 대중적인 입장에서 더 모호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다행스러운 변화다.




-파주의 집으로 자주 전화가 걸려오지만 전화는 늘 이내 끊기고 만다. 맥락상 전화를 건 사람이 엄마라는 추측도 가능한데.



=알 수 없지. 엄마라고 추측할 만한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나는 좀더 일상의 미스터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보고 싶다. 일상에서 잘 알아차리기 힘든 작은 미스터리들이 큰 세계의 미스터리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이번 영화에서 전달하고 싶은 기본적인 느낌이었다. <버닝>은 자꾸만 걸려오는 전화를 포함해 영화에 숨어 있는 여러 의문을 어느 한쪽으로 믿기 시작하면 아귀가 맞지 않는 영화다. 여러 개의 그림 퍼즐마다 계속 한두 조각이 빠져 있는 형국이다.



-유독 종수가 자다 깨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하나의 시퀀스가 끝나면, 다음 시퀀스에서 고통스런 얼굴로 잠에서 깨어나는 종수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돌아간 집에서 아침까지 푹 자는 건 조금 비현실적인 일 같다. 한번쯤 깨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할 것 같다. 거기엔 종수의 강박이 묻어난다. 종수를 짓누르고 있는 무의식이 꿈으로 보이다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한 감정으로 드러난다.



-해미가 종수에게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경험을 들려주는 대목은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점에서 <버닝>에선 시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두컴컴하다는 점에서 우물은 해미가 살아가는 현실과 비슷하지 않나.



=변호사(문성근)는 종수에게 아버지(최승호)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하고, 벤은 언젠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관객 역시 자신만의 서사로 이 영화를 읽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해미도 그렇다. 해미의 언니는 해미가 이야기를 감쪽같이 잘 지어내는 아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거짓말을 잘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스스로 욕망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거다. 해미가 우물에 빠진 자기를 누군가가 구원해주는 서사를 품고 있다면, 지금 자신이 우물에 빠진 상태와 같다고 느낀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해미가 없어진 영화 말미의 상황은 해미가 지금 구출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충분히 그럴 단서는 있다. 해미는 카드빚이 많고, 아프리카까지 가서 죽기는 무섭지만 자신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구원을 바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것을 질문하는 영화보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해주는 서사를 쉽게 즐기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더 편한 시대다.



-술자리에서 춤을 추는 해미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시선이 흥미롭게 묘사되었다. 종수는 그런 해미가 부끄럽기도 하고 술자리 자체가 불편한 복합적인 심경이 묻어나는 데 반해 벤은 하품을 한다. 종수는 그런 벤을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진 채 바라보는데.



=벤의 하품은 꽤 중요한, 의도적 코드였다. 지루함이나 공허의 표현일 수 있고, 혹은 진지함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해미는 지나치게 진지하다. 종수 역시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하면서 작가 지망생으로서 현실 인식을 키워 나가지만, 해미처럼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해미의 태도는 약간 자조적으로 말해서 대책이 없다. 매우 어렵고 근본적인 질문이니까. 해미는 그런 진지함을 가진 인물이고, 벤의 하품은 그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벤과 해미 그리고 종수가 대마초를 피우는 시퀀스에서 해미가 춤을 추고 나면 종수가 “아무 데서나 옷을 벗고 다니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라는 말을 한다. 원작에는 없는 몇몇 대사들 중 관객, 특히 여성이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대사도 있는 것 같다.



=종수의 생각과 영화를 만든 감독의 생각을 같다고 보면 불편할 수도 있다. 질투를 포함한 여러 감정에 뒤섞인 채 그런 식의 표현을 내뱉는 것이 남자들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했다. 종수는 젊지만 그럼에도 남성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남녀 관객 모두에게 종수가 결국 ‘그런’ 인물이라는 것이 비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쁜 말을 뱉고서 마음에 걸리니까 자꾸 통화 좀 하자고 해미에게 전화를 해대는 것까지 비슷한 맥락이다. 어쩌면 해미는 종수의 그런 행동 때문에 떠난 것일 수도 있다.



-대마초 시퀀스에는 자연의 빛과 바람이 빚어낸 마법같은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당시 현장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



=해미가 춤을 추는 장면은 현실의 배경 너머로 초월적인 힘이 느껴지길 원했다. 거기엔 우선 종수의 집이라는 현실이 있고, 낮과 밤의 경계에서 노을도 이제 막 사라져가는 짧은 시간이 겹쳐져 있다. 저 너머에 북한이 있고, 자유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태극기가 펄럭이고, 축사에선 소가 운다. 바람이 불고 초승달이 떠 있는, 거의 우주적이라고 할 만한 순간이다. 그 안에서 한 여자가 자신이 믿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추는 거다. 실제로 영화에 담기에 굉장히 어려운 장면임이 분명했다. 해미가 추는 춤조차 계산된 안무가 아닌 원초적이고 자유로운 움직임이어야 했으니까. 영화적 즉흥성이 필요하면서, 그렇다고 즉흥성에 모든 것을 내맡기긴 어려운 촬영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예상했다. 하루에 두 테이크 정도 찍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첫날은 오케이 없이 넘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한번에 돼버린 거다. “어? 잘되네” 하고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다가 끝까지 가게 됐다. 이런 건 내가 찍은 게 아니라 그냥 찍힌 거라고 본다. 내게 영화는 본질적으로 우연성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기존의 내 영화는 사실 우연성을 반영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런데 유독 <버닝>은 달랐다. 운이 맞아떨어져 찍힌 장면이 많다. 아마 디지털 촬영과도 관계가 있겠지.



-종수가 달릴 때 새 떼가 자연스럽게 프레임에 들어오는 순간도 그렇지 않나.



=학교에서 강의할 때도 자주 이야기했는데, 영화는 운을 맞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새 떼가 날아오는 그림이 영화적으로 볼거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빠져들면 안 된다. (웃음) 실은 영화에 사용한 장면보다 더 많은 새가 날아오는 테이크도 있었다. <버닝>을 찍을 땐 그처럼 의도치 않게 괜찮은 그림이 나온 순간들이 많았다. 티저 예고편에서 종수가 안개 속을 뛰는 장면도 영화에서는 일부러 제외했다. 어렴풋한 안개의 이미지가 영화 컨셉과 잘 맞기는 하지만 너무 멋있는 건 어쩐지 내게 맞지 않는 것 같더라.



-종수가 벤이 말한 비닐하우스를 찾는 장면들은 추격이나 탐색보다는 배회에 가까운 느낌도 들었다. 종수의 시선이나 풍경 처리 등 달리는 장면을 연출할 때 고민한 건 뭐였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운 정서로 공간을 받아들이는 느낌을 원했다. 자기 것이긴 하지만 벗어나려고만 했던 공간에 수상한 인물이 등장해서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하니까 종수는 그제야 마을을 돌아다녀본다. 둘째로 스릴러의 텐션과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기존의 매뉴얼을 부수고 싶었다. 매뉴얼대로 강화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어렵지 않다. 내가 원했던 것은 종수가 달리면서 마주하는 새벽의 풍경만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영화적으로 새로운 시도였다.



-<위대한 개츠비>식의 서사로 이해하자면,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결말은 종수가 해미 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장면이 아닐까.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그 경계일 수도 있다. 문제는 종수가 소설을 ‘쓴다’가 아니라 종수가 ‘어떤 소설’을 쓰는가다. 우리 혹은 영화를 만드는 나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지, 관객은 어떤 서사를 원하는지가 핵심이라고 본다. 단순히 쓰기를 시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벤을 죽이고 모든 걸 불태우는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모든 걸 불태우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라를 질문을 던져주기도 하는데.



=그 장면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주길 원했다. 어린아이처럼 덜덜 떨고 있는 몸 그 자체를 봐주기를. 그 몸에 담긴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죄의식인지는 알 수 없다. 벌거벗은 몸의 이미지가 새로 태어난 생명의 이미지인지 괴물의 이미지인지 또한 알 수 없다. 마지막 선택 이후에 관해서는 관객 각각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극찬을 받은 칸과 달리 국내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관습에 도전하는 영화이기에 분명히 저항감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제에 가서 모두가 좋아하는 반응을 처음 경험해봤다. 예술에 정의가 없다면 칸영화제 경쟁작이란 개성이 강한 영화라는 의미가 아닌가. <버닝> 역시 호불호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좋다고 하는 반응이 되레 생각할 거리를 줬다. 국내는 바깥보다 좀더 냉정한 반응인 것 같다. 마케팅 과정에서 마치 칸 수상에 올인하는 것처럼 비춰진 것은 괜한 기대나 실망을 높인 것 같아 아쉽게 생각한다. 영화가 이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관해,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소통에 관해 오래 고민해보고 싶다. 영화 만들기에 관한 내 안의 동력과도 관련 있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