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서울국제여성영화제①]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 회고전·마스터클래스 주인공
2018-06-13
글 : 이주현
사진 : 오계옥
“한국의 여성들은 준비가 됐다. 더 자유롭고 평등해질 권리가 있다”

올해 여성영화제의 회고전과 마스터클래스의 주인공은 퀴어영화의 선구자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이다. 트로이트의 영화엔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레즈비언 바의 드래그 킹 쇼 등 다양한 하위문화를 즐긴다. <유혹: 잔인한 여자>(1985), <버진 머신>(1988), <아버지의 방문>(1991) 등 트로이트의 초창기 극영화들은 고정된 성 역할과 젠더 이분법에 반기를 들고 과감한 여성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트로이트의 탐구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최근엔 보편적 인권 문제나 사회문제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영화제의 모니타 트로이트 회고전에선 <버진 머신> <아버지의 방문>을 비롯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트랜스젠더들을 다룬 <젠더너츠>(1999), 브라질의 빈민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돕는 여성 인권운동가의 이야기를 기록한 <빛의 전사>(2001), 대만에서 작업한 두편의 영화 <귀신 들린>(2009)과 <호랑이 여자들 날개를 달다>(2005) 이상 6편이 상영됐다. 상영작 6편을 중심으로, 모니카 트로이트 감독의 대담한 시도와 영화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멀리 한국에서 회고전과 마스터클래스를 갖게 됐다.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 작품이 한국 관객에게 조금은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들었다. 또한 최근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한국의 여성들은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다. 더 자유롭고 평등해질 권리가 있다. 1980년대부터 여성운동을 해온 나로선 이제는 투쟁의 단계가 지났다고 생각하지만, 나라마다 나름의 리듬과 속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시기에 한국에 온 게 좋은 타이밍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의 여성들은 준비가 됐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한국은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한 편견도 존재한다. 한창 영화 작업을 시작하던 1970~80년대 독일 상황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보수적인 사회에서 도발적인 퀴어영화를 만드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사람들은 당시 내가 영화를 통해 제시한 여성의 이미지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가 원한 여성의 이미지는 말 잘 듣고 싸우려 하지 않는 순종적인 여성이었다. 그런데 엘피 미케시와 공동연출한 첫 영화 <유혹: 잔인한 여자>에선 레즈비언 커플이 사도마조히즘(SM) 롤플레이를 한다.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아무도 우리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하이에나 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차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에선 우리의 영화가 지지받지 못했지만 다행히 북미에선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고 북미 배급도 하게 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여성의 진짜 이미지는 무엇이었나.

=그 당시에도 여성감독들은 존재했지만 그들이 그리는 여성은 주류 여성의 이미지를 답습한 결과물이었다. 초기작엔 사도마조히즘의 세계에서 도미네이션(지배)의 위치에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적어도 그러한 하위문화 안에서는 여성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과거 모계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권력을 쥔 강한 여성, 군림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를 제시하려 했다.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슈가 훌륭한 연기를 펼쳤는데도 남성 관객은 그녀가 보여준 영화 속 이미지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받아들이더라. 그렇다고 영화가 심각하게만 흘러가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영화 속 유머 코드를 잘 읽지 못했다. 우리의 퍼포먼스와 유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악몽 같았다고도 했다. (웃음)

-<버진 머신>은 낭만적 사랑에 대해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철학적으로 질문하던 독일 여성이 미국에서 성적 욕망과 판타지에 눈뜨는 이야기다. 독일 여성 도로티의 여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었나.

=여성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한다거나, 여성은 사랑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랑에 대한 신화가 만연한 때가 있었다. 그 신화를 공격하고 싶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는 16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됐는데, 낭만적 사랑의 핵심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미국식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식 사랑은 돈으로 사고파는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에서부터 돈으로 사고파는 사랑까지 양극단의 사랑이 제시된다. 주인공 도로티를 비롯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극과 극의 사랑 사이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사랑이 뭔지, 자신만의 사랑 방식은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있게 하고 싶었다.

-1980년대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 경험한 것들이 <버진 머신>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나.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독일, 통일 이전의 독일은 지금과는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숨 쉬기도 힘들 만큼 답답하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그런 답답한 나라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더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더라. (웃음) 여성들을 위한 전용 스트립바가 있을 정도로 하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마치 사탕가게에 들어간 아이가 된 것처럼 미국의 문화를 즐겼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버진 머신>과 <아버지의 방문>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방문>에도 미국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성적 모험을 감행하는 독일인 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버지의 방문>에선 어떤 시도를 하고 싶었나.

=<아버지의 방문>을 만들게 된 몇 가지 모티브가 있다. 우선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FTM)한 트랜스젠더에 대한 관심이 이 영화에 반영됐다. 지금은 옛날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1980년대 말 미국에서 FTM 트랜스젠더 친구들을 만났다. 목소리도 굵직하고 외모도 행동도 보통의 남자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경우보다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사람이 성공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 사례들은 결국 남성처럼 행동하는 것, 남성의 이미지를 갖는 게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여성처럼 보이는 건 어렵지만 남성처럼 보이는 건 쉽다는 그 포인트가 내게 흥미로웠다. 두 번째로, 당시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비싼 학비를 들여가며 뉴욕의 연기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들 중 배우가 되는 사람은 단 2%에 불과했다. 다수는 졸업 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산다. 그런 현실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세 번째로는 가부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전형적인 독일의 아버지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요소들이 <아버지의 방문>을 구성하고 있다.

-<젠더너츠>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는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큐멘터리다. 트랜스젠더의 삶과 문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해왔는데.

=1990년대 들어 성전환 관련 의학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만약 내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기 훨씬 쉬웠을 거란 생각을 한 적도 있고, 개인적으로 그런 기회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 위해 몸을 만드는 데만 2~3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차라리 트랜스젠더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면서까지 성전환 수술을 하는 이유는 태어날 때 주어진 성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통도 크고 가족은 물론 친구들까지 잃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결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외면하고 있어서 모를 뿐이지 실제로 300명 중 1명은 트랜스섹슈얼이라고 한다. 트랜스섹슈얼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결코 부자연스러운 무엇이 아니다. 게이 펭귄 커플이 알을 훔쳐 부화까지 시키는 일도 있지 않나. 어떻게 보면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유연하고 관대한 것 같다.

-<빛의 전사>는 브라질의 빈민가 아이들에 대한 다큐멘터리고, <호랑이 여자들 날개를 달다>는 대만의 현대사 속에서 세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다큐멘터리다. 작가로서의 관심사가 초기와는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밀레니엄이 될 무렵, 내가 지금까지 너무 영화, 페미니즘, 젠더라는 주제에만 관심을 쏟고 살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 급변하던 시대였고 나도 세상의 변화에 동참하고 싶었다. 눈을 돌리니 세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자연히 내 관점도 확장됐다. 그즈음 브라질의 여성 인권 운동가 이본느 베제라 데 멜로를 알게 됐다. 이본느 베제라 데 멜로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운동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작품이 <빛의 전사>였다. 이 작품이 독일 방송에서 방영되면서 지원금이 꽤 모였다. 영화로 이런 좋은 일을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젠더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젠더 문제에는 관심이 많다.

-혹시 퀴어영화에 눈뜨게 해준 선배 예술가가 있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0~70년대 뉴 저먼 시네마 부흥기에 독일 공영방송에선 파스빈더 영화를 자주 틀어줬다. 그래서 10대 때 TV로 파스빈더의 영화들을 봤다.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사회를 전복하는 이미지,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에 영감을 받았다. 특히 <케렐>(1982)을 보면서 그 영화가 내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미학적으로 어떻게 실험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게 해준, 내게 큰 영감을 준 감독이 파스빈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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