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모호한 세상에 대한 영화의 형식적 대응
2018-06-13
글 : 윤웅원 (건축가) |
<버닝>, 모호한 세상에 대한 영화의 형식적 대응

나는 <버닝>을 보고 실망했다. 영화가 재미없었다거나 흥미롭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대와 달라서 실망했다’는 뜻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내가 이 의미 없는 세상에서, <버닝>의 대사를 빌리면 ‘베이스’를 느끼게 해줄 영화를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래의 글은 첫 번째 실망한 영화와 두 번째 다시 보고 이해한 영화에 대한 글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중에서 <밀양>(2007)과 <버닝>은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밀양>은 이청준의 1985년 단편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3년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영화의 다른 이야기는 당연히 두 단편의 ‘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이고, 또한 각 소설이 갖고 있는 다른 ‘콘텍스트’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 나는 두 번째 영화를 본 후, 어쩌면 <버닝>은 ‘콘텍스트’ 자체가 영화의 형식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양>과 <버닝> 모두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버닝>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밀양>과는 다른 태도를 갖고 있다. 특히 해미(전종서)의 집이 나오는 장면 이후부터 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버닝>의 세 주인공, 해미, 종수(유아인), 벤(스티브 연)은 각각 용산 다가구 꼭대기 방, 파주의 농가, 서래마을 고급 빌라에 살고 있다. 아마도 각각의 경제적 계급에 어울리는 주거가 선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 영화와는 달리 각각의 공간에는 어떤 ‘의미’ 혹은 ‘상징’ 같아 보이는 것이 부여되어 있다. 해미의 북향방에는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희미한 빛이 하루에 한번 들어오고, 접경지 근처 종수의 농가에는 대남방송이 들려오고, 벤의 고급빌라 베란다에서는 세련된 건축가의 건물이 보인다.



영화를 보고 처음에 들었던 의문은, 왜 작위적이란 위험을 무릅쓰고 해미와 종수의 정사 장면에 남산타워로부터 반사된 빛을 보여주고, 종수의 집에서 대남방송이 들리게 하며, 이제는 어떤 전형적인 것이 되어버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해미의 춤에 사용해서 그 장면이 갖고 있는 날것의 느낌을 거슬리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해미라면 북향 집의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조차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고, 접경지 집은 종수가 아닌 그의 아버지의 선택이며, 벤과 같이 외국 문화에 익숙하고 세련된 오늘날의 젊은 부유층은 자신들의 심미안을 중요시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밀양>같이 완벽하게 조율된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 <버닝>처럼 불명확하고 오해의 여지를 갖고 있는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은 계속해서 남는다.



영화에서 공간이 지나치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될 때 주의할 점은 이것이 서사를 방해할 위험성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버닝>의 실질적인 첫 장면, 해미의 집 정사 장면에서 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의 어른거림은 <밀양>의 마지막 장면, 신애(전도연)의 잘린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는 희미한 태양빛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점은 세상 모든 곳을 비추고 있는 빛이 아닌 특정한, 서울의 상징인 남산타워에서 반사된 빛이다. 이 장면은 <버닝>이 어떤 ‘은유’나 ‘상징’을 더 중요시 하는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나는, 왜 이창동 감독이 <버닝>에서 이런 변화를 선택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밀양>과 <버닝> 두 영화 사이에서 달라진 것은 이청준이 무라카미 하루키로 변하고, 배경이 2007년의 밀양에서 현재의 서울로 달라졌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983년’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요소들인 아프리카 여행, 독일제 스포츠카, 로스트 비프 샌드위치와 샐러드, 스모크드 새먼 같은 음식들이 오늘날의 서울과도 꽤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영화가 소설의 내용과 달라진 것 중 눈에 띄는 한 가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아프리카는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 지역인 반면, <버닝>의 아프리카는 케냐 같은 중부 지역이다. 소설에서 아프리카가 알베르 카뮈로 인식되는 유럽의 연장으로서의 북부 지역을 의미한다면, 영화의 아프리카는 그냥 여기 아닌 다른 세상으로서의 아프리카다.



<밀양>의 초반부에는 서울에서 온 신애가 동네 양품점 주인에게 가게의 인테리어를 밝은색으로 바꿔보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신애의 제안을 무시하던 주인이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인테리어를 바꾸고,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를 반갑게 맞이하는 장면이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갖고 공간을 계획하는 것은 낯선 현상이다. <밀양>의 공간들은 균질하고 자연스럽다. <밀양>의 도시 공간은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주로 필요와 집단적인 관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반면에 현재의 서울은 다르다. 수많은 개인의 ‘의도’들이 충돌한다.



<버닝>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여겨지는 해미의 춤 장면을 한번 살펴보자. 여기에는 종수, 벤, 해미를 대표하는 요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다. 대남방송이 들리는 농촌 풍경과 축사가 딸린 농가, 포르셰와 마일스 데이비스, 마임 춤이 공존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은 벤의 선택이다. 벤이 자신의 자동차 오디오 기기를 틀어놓았다. 자유로운 새를 직접적으로 상징화해서 약간 촌스럽게 느껴지는 춤은 팬터마임을 배우고 있는 해미의 선택이다.



물론 대남방송이 들리는 농촌은 선택할 수 없는 종수의 선택이다. <버닝>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세 주인공 각각의 선택이 독립적이고, 또한 이들의 선택을 감독(이야기)의 선택으로 오해하게 하는 장면들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모든 캐릭터의 선택은 동시에 감독의 선택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밀양>의 부흥회 장면에서 신애가 틀어놓은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처럼 주인공의 선택이 감독의 선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버닝>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세 젊은이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의도를 갖고 있는 개별적인 선택들을 감독 한 사람의 선택으로 수렴한다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인 대도시 서울은, 지방 소도시 밀양과 달리 균질하지 않은 뒤죽박죽의 세계에 가깝다.



<버닝>의 장르를 내 마음대로 명명해본다면 ‘진실은 알 수 없다’ 장르다. <버닝>은 이 장르의 목표를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교하게 짜여 있다. 해미가 종수에게 어릴 때 자신이 못생겼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형한 자신에게 “종수야, 이제 진실을 말해봐!”라고 말하는 장면부터, 영화의 마지막에 벤이 자신을 의심하는 종수에게 “종수씨, 해미와 같이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는 장면까지, 영화는 일관되게 ‘진실은 알 수 없다’를 향해 나아간다. 아니, 마지막 장면의 칼에 찔린 벤의 표정조차 <버닝>은 ‘우리는 알고 있다’는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갖고 있는 미스터리한 결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이 ‘진실은 알 수 없다’는 주제는 <버닝>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확장된다. <버닝>의 모호함 자체는, 우리의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영화의 ‘형식적인’ 대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