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는 민규동 감독이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겨레교육문화센터 영화제작학교에서 생애 최초로 만든 단편영화와 제목이 같다. 그렇게 퀴어 단편 <허스토리>로부터 위안부 소재 장편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한국 상업영화 시장 안에서 여성주인공 영화를 끊임없이 만들어온 흔치 않은 남성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 데뷔작부터 그러했다. 심지어 그보다 전에 영화제작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썼던 자기소개서도 <레옹>(1994)에서 마틸다(내털리 포트먼)가 갱에게 부모가 살해당하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레옹(장 르노)을 찾아가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의 절박한 심정, 그러니까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마틸다의 심정을 편지 형식으로 써내려간 것이었다. 당시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고 딱히 경력도 없어서 딱딱한 자기소개서 형식을 벗어나, 그처럼 영화를 만들고픈 꿈을 여성주인공의 처지에 이입하여 썼다고 한다.
<허스토리> 또한 한국영화계에서 모처럼 여성주인공들이 전면에 나서는 영화다. 그 쾌감이 상당할뿐더러 민규동 감독의 이전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도 있다. 먼저 영화 속 문 사장(김희애)과 신 사장(김선영)이 장난처럼 뽀뽀하며 서로를 응원할 때는 그의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공동연출 김태용, 1999)에서, 물론 두 영화의 해당 장면의 정서가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시은(이영진)과 효신(박예진)의 그 유명한 키스 장면이 괜히 떠올랐다. 그 전 장면에서는 같은 반 친구가 효신에게 “너한테 이상한 냄새 나. 무슨 레즈비언 냄새 같은데?”라며 빈정대기도 했다. 한국영화계에서 퀴어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할 때, 여고생들이 학교에서 키스하다 걸려서 퇴학당한 이야기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단편 <허스토리>도 그러했지만, 그 키스 장면과 레즈비언이라는 대사 자체가 무척 충격적이고 선구적이었다.
또 <허스토리>의 문 사장은 그의 이전 영화들 중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의 연정인(임수정)과 가장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남편(이선균)의 핸드폰에 이름이 아니라 ‘투덜이’라고 저장돼 있는 연정인은 시종일관 당당하고 직설적이다. 그런 그녀가 라디오 방송 도중 “침묵에 길들여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전 계속 말할 거예요. 저 자신이 누군지 잊지 않을 거예요. 저랑 비슷한 분이 계시다면 귀 막고 입 막고 장롱 속으로 숨지 마세요. 그냥 계속 떠드세요. 그럼 누군가 꼭 답해줄 거예요.” 이 또한 두 영화의 정서가 좀 다르긴 하지만, <허스토리>의 문 사장도 오직 직진만 하는 자신에게 여유를 가지길 충고하는 친구에게 “내가 내 아닌 척하고 살 순 없다 아이가?”라고 반문한다.
이번 1160호는 <허스토리> 대특집이다. 민규동 감독 인터뷰부터 김해숙, 김희애, 문숙, 예수정, 이용녀 배우 커버 촬영 인터뷰에다 촬영, 미술, 의상, 로케이션 관련 제작기까지 무려 24페이지에 달한다. 모처럼 관록 있는 여성배우들로 꽉 찬 뿌듯한 촬영현장이었다. 이번호 민규동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남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흠결이 없는 여성영화여야 했다”는 얘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단편 <허스토리>부터 장편 <허스토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섬세하고도 묵묵히 걸어온 그 길의 진심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