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하나의 매혹적인 장면과 마주한다. 클럽에 있던 흑인들이 차례로 연행되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클럽 앞으로 모여든다. 체포되는 친구를 걱정하는 웅성거림, 경찰에 항의하는 볼멘소리들. 그들의 음성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천천히 몰려와서는 어두운 골목을 가득 메운다. 시끄럽고 폭력적이지만 풍성한 소리들의 다발, 이 장면에서 여러 목소리가 흘러넘치며 만들어내는 위태롭고도 관능적인 에너지는 다른 여느 장면들을 가볍게 압도한다. 동시에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디트로이트>에서 제각기 떠드는 다중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어째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장면이 전환되면 한 남자가 위험한 장난을 벌이고 있다. 장난감 총으로 공포탄을 쏘는 칼 쿠퍼(제이슨 미첼)의 목적은 단 하나, 총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흑인들의 심정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허공에 울리는 공포탄의 총성은 울분에 찬 칼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리가 창문을 넘어 경찰에게로 향하자 화가 잔뜩난 경찰들이 모텔 앞으로 몰려든다. 자, 여기까지. 영화는 50년 전 디트로이트에서 차별에 항거하여 소란스럽게 터져나왔던 소리들을 응시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칼의 실없는 농담을 통하여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어떤 제안 하나를 우리에게 슬며시 건네어온다.
폭력을 전시한다는 꾸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번 비극의 장소에 함께 입회하여 그 순간을 체험해볼 것을 끈질기게 고집해왔다. 알제 모텔의 문이 열렸고, 우리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실탄 없는 총성의 위협
모텔에 도착한 경찰들은 가장 먼저 칼을 살해한 뒤, 흑인 투숙객들을 복도에 일렬로 세우고 매질을 하며 총의 소재를 따져 묻는다. 잠시 후 경찰 필립(윌 폴터)은 그들에게 기도를 할 것을 주문한다. 기도와 찬송, 이 지극히 사적인 행위는 폭력적으로 강요되고,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듯 괴롭게 기도를 이어간다. 영화는 좁은 복도에 갇힌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공적, 사적인 영역 모두에서 발언의 자유를 박탈당했던 당대 흑인들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폭력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온몸으로 비명을 내지른 유일한 인물이 백인 여성 캐런이라는 사실도 인종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총의 소재를 찾을 수 없었던 경찰들은 이제 가학적인 심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그 심문의 방식이 독특하다. 복도의 흑인 중 한명을 방에 데려가서 총소리를 낸 뒤, 마치 죽은 듯 그 자리에 조용히 있게 한다. 그래서 복도에 남은 이들이 그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하여 겁에 질려서 무언가 발설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곧 누군가를 무리에서 이탈시킨 뒤 그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행위다. 경찰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고,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그들은 이 세계에서 죽은 자들이다. 허락한 말밖에 할 수 없는 복도, 그들을 차례로 집어삼키는 검은 방. 캐스린 비글로는 알제 모텔이 두개의 층위로 나뉘어 연동하며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과정을 통하여 50년 전 미국을 환유한다. 이곳을 떠나기 직전, 경찰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한명씩 데려다가 그들이 벌인 범죄 행위를 발설할 것인지를 묻는다. 누군가는 침묵을 약속하고 누군가는 도망치지만, 여기에 희생된 사람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 자는 그대로 죽임을 당한다. 마지막 발언까지 완벽하게 삭제하고서 경찰들은 알제 모텔을 떠나간다. 결국 이 밤에 세명의 흑인이 희생되고 끝내 총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두 칼의 짓궂은 장난과 경찰의 오해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헛소동일까. 실은 그들은 실탄 없는 총성만으로도 완전한 위협을 느꼈다고, 그 소리를 죽이기 위하여 이곳에 찾아와 기어코 임무를 완수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되찾았을까. 그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후반부의 법정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의 증언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일하게 진실의 말(경찰들이 나를 때렸고, 이 증인 신문조차도 폭력이다)을 토해낸 남자는 법정에서 쫓겨난다. 누군가가 그 지옥으로부터 살아남았다지만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고 확인하는 목소리는 이곳에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날 밤, 알제 모텔을 무사히 살아나온 목소리는 없다고. 이 영화적 세계에서 자유로이 발언할 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의 생존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왜 이렇게 모호해야 했나
<디트로이트>는 알제 모텔 사건을 소재로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그 사건의 진실을 발굴하고 폭로한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필립이 끈질기게 의심을 던졌던 사실들, 줄리(한나 머레이)의 성매매 여부나 그린(앤서니 마키)의 공군 복무 여부에 대하여 영화는 의도적으로 확답을 피하고, 마지막에는 “입증된 사실은 없고 관계인들의 기억과 증언만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는 자막이 오른다. 영화가 틈틈이 드러내는 모호한 구멍과 한계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역사적 재구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주저앉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실패하고 흩어진 바로 그 자리에서 비글로는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하여 손짓한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폭동 때문에 예정된 공연이 무산되자 래리(알지 스미스)는 아쉬운 듯 텅 빈 무대 위를 서성인다. 소란한 바깥과 고요한 객석의 대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이 장면을 내리누른다. 그때 불현듯 래리가 노래를 시작한다. 팽팽하게 긴장된 극장의 공기를 뚫고 비행하는 래리의 아름다운 목소리. 이 장면은 내게 <허트 로커>(2008)에서 보았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이 폭탄을 제거하려고 걸어가던 그 긴장된 순간에도 불현듯 경직된 공기를 뚫고서 정체 모를 차 한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비글로는 자주 폭발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적막한 공기와, 그것을 찢고 들어오는 유려한 움직임을 통하여 서스펜스를 직조한다. 예상치 못하게 벌어진 틈새는 아름답고 신비롭지만 불안을 고조시키고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무대 위를 떠돌던 래리의 목소리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지 못했으니, 결국 이 장면의 불안과 공포는 실현된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순간, 그를 괴롭힐 누구도 없는 교회에서 래리는 자유로이 가스펠을 부른다. 그의 노래에 조용히 집중하는 영화를 보고 있자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디트로이트>는 래리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기 위하여 50년의 시간을 건너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비글로의 진짜 야심은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에 사라졌던 목소리들을 불러모아서 이곳에 되살리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품을 때 앞서 등장한 군중의 목소리가 그다지도 매혹적이었던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사건을 입증할 수도 없는 명백한 한계 앞에서 비글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단순한 행위가 품는 넓은 세계를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짓밟히고 삭제된 목소리의 회생을 소망하는 끈질기고 간절한 몸짓. 그것만으로도 <디트로이트>는 더 많이 관람되고 회자되어야 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