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션스8>의 앤 해서웨이는 ‘앤 해서웨이’를 연기한다. 미디어와 대중이 지어내고 놀림감으로 삼았던 본인의 공적 이미지를 패러디한다. <레미제라블>(2012)로 오스카를 수상한 무렵을 전후해 타블로이드 언론과 일부 대중은 해서웨이를 험담했다. 이유는 어이없게도, 지나치게 노력하며 지나치게 ‘여배우’스럽다는 것이었다. 해서웨이가 연기하는 할리우드 배우 다프네는 외모와 인기에 집착하고 일거수일투족이 포즈다. 데비 오션(샌드라 불럭) 일당은 다프네를 고가의 목걸이를 건 마네킹 정도로 여기지만, 곧 반성할 일이 생긴다. 그러나 다프네는 숨겨진 면모가 드러나기 전에도 충분히 근사하다. 그가 거울 앞에서 목걸이를 걸고 음미하는 장면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8) 이후 최고의 ‘오르가슴’ 연기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상투적 이미지를 만지작거리며 즐기는 <오션스8>의 앤 해서웨이는 종달새처럼 자유롭다.
06/01
영화에 세게 맞아본 적 있니? 푹 찔려본 적 있니? 누군가가 <유전>을 궁금해한다면 일단 이렇게 반문할 것 같다. <유전>이 내게 남긴 멍과 같은 자국을 설명하기는 까다롭다. 무서웠다기보다 마구 휘저어진 기분이다(나쁜 영화를 봤을 때의 불쾌감과는 전혀 다르다). 이 기괴한 동요는 어디서 오는 걸까? 우선 꿈에 나올까 무서운- 그러나 나오겠지-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는 이미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1999) 이후 이 계열로는 제일 끔찍한 체험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유전>은 애니(토니 콜레트)가 어머니 엘렌의 죽음을 맞이하며 시작한다. 모녀 사이는 나빴고 장례식에는 가족이 처음 보는 추모객이 너무 많다. 애니의 가족사는 불운으로 점철돼 있다. 아버지는 아사했고 오빠는 자살했으며 어머니는 비밀이 많았다. 손주들에 집착한 엘렌은 애니의 딸 찰리(밀리 샤피로)에게 젖을 먹이겠다고 고집했고 찰리 역시 엘렌을 따랐다. 애니는 몽유병으로 아들 피터(알렉스 볼프)의 침대에 불을 지를 뻔한 적이 있는데 아들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짐작건대 애니는, 지옥의 왕을 숭배하는 사교(邪敎)의 여왕 격이었던 어머니가 피터를 취하지 못하도록 무의식적으로 낙태를 원했고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는 앞질러 피터를 해치려 했다. 모자 사이에 드리워진 엷은 막은 피터가 다른 가족을 다치게 하는 사건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벽이 된다.
<유전>은 할머니에서 손녀한테 유전된 악령 이야기처럼 보이다가 애니의 죄책감이 부른 노이로제 괴담으로 전환되나 싶더니 다시 뒤집혀 오컬트 호러로 귀결된다. 일견 고르지 않다. 특히 제3장에 집중된 설명은 다소 모호하고 갑작스럽다. 그러나 세개의 장(章)을 관통하는 통주저음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늪이다. <유전>의 아리 애스터 감독은 수십년 해로한 부부 사이의 심연을 그린 앤드루 헤이그 감독의 <45년 후>를 “거의 완벽한 영화”라고 예찬한 바 있다. <유전>에서 첫 번째 두려움은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애니의 자책이다. 그는 딸과 아들을 사랑하나 충분치 못하다는 불안을 갖는다. 딸은 할머니에게 더 애착하고 아들은 내심 엄마를 저어한다. <유전>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피터가 훼손된 시신이 실린 차를 그대로 차고에 넣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아침에 이를 발견한 엄마가 짐승처럼 비명을 지를 때까지 얼어붙어 있는 밤이다. 뒷날 피터를 향한 애니의 분노가, 사고를 초래한 과오를 향하는지 자기가 참상을 목도하게 만든 것에 대한 증오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러나 피터의 행위가 더욱 몸서리쳐지는 이유는 이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죽어 사라지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는 무력함, 세상의 통념과 달리 어떤 경우든 가족이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믿지 못하는, 우리가 잘 아는 불안.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애니와 피터가 속내를 드러내며 충돌할 때 카메라는 높고 넓게 지은 세트를 이용해 인물 사이의 거리를 강조한다. 가깝기에 쉽게 행해지는 심리적 착취,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책감, 혈육을 해친 자가 혈육이어서 출구가 막힌 원초적 증오 등 <유전>의 서사는 가족과 관련된 터부를 연타한다.
죽은 어머니의 어두운 비밀을 확인한 결말부의 애니는 영화를 통틀어 제일 생기 있다. 심지어 신나 보인다. 남편에게 사랑을 천명하고 “우리 아들을 지켜야 해!”라고 외치며 달게 목숨을 희생하겠다고 자처한다. 외부의 악을 발견함으로써 실패한 엄마이자 딸이라는 죄책감을 벗은 것이다. <유전>은 <바바둑>(2014)이나 <오큘러스>(2013)와 달리 심리적 트라우마로 괴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호러가 아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우리에게 그저 부여되는 가족이라는 중대한 조건을, 통제할 수 없는 숙명과 저주로 해석하고 그 지점에서 오컬트를 끌어들인다(자신의 경험을 미니어처로 재현하는 애니의 작업은 가족과의 삶을 관리할 수 없는 무력감의 대리해소다). 비단 유전병뿐만 아니라, 아무리 싫어도 발현되는 가족유사성, 분명한 타인임에도 따라다니는 연대 책임 등을 <유전>은 극히 비관적인 운명론의 렌즈로 바라본다. 토니 콜레트의 눈부신 연기는 <유전>을 이 배우가 호연한 <식스 센스>(1999)에 비교하게 만든다. 그러나 당치 않다. <식스 센스>는 따뜻하고 희망적인 결론의 영화였다!
06/05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2007) 이후 쓰나미 가족재난영화 <더 임파서블>(2012), 아픈 엄마를 둔 소년의 판타지 <몬스터 콜>(2016)을 만든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에서도 어린이의 분리 불안에 주목한다. 부호 록우드(제임스 크롬웰)의 손녀 메이지(이사벨라 서먼)는 단지 총명하고 착한 블록버스터의 아역에 그치지 않고 탄생의 비밀을 통해 공룡과 동병상련의 관계에 놓인다. 나아가 속편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요나는 캘리포니아 숲속의 고풍스런 석조 맨션을 록우드 저택으로 설정함으로써 장기인 유럽식 고딕 호러의 무대를 마련한다. 전쟁 무기로 쓰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합성된 공룡 인도랩터는 <노스페라투>(1922)의 흡혈귀와 닮은 인간형의 손을 갖고 있는데, 딱히 살상에 유용한 것 같지는 않고 으스스한 그림자를 만드는 데에는 딱이다. 나선형 계단과 경사진 지붕, 유리 천장, 음식 엘리베이터는 도주와 액션의 스테이지로 기능하고 지하의 첨단 연구실과 감옥은 흡사 <프랑켄슈타인>이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현대판 공간 같다. 그나저나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꽤나 대책 없이 끝난다. 바야흐로 공룡들이 미국 본토에 풀려났고 똑똑한 랩터 블루는 공룡계의 시저(<혹성탈출>의 유인원 지도자)가 될 태세다. 장차 속편은 계속 공룡을 방사했다 가두기를 반복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내게 아이디어가 하나 있다. 유니버설과 엠블린이,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지저세계 펠루시다> 판권을 사들여 파충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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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오
무엇이 좋은 커플을 만드는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아녜스 바르다 감독과 사진가 JR은 이 영원한 질문에 대한 독특한 대답이다. 즉석인화 트럭을 몰고 프랑스 지방을 다니며 보통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설치하는 둘은 상상하기 힘든 복식조다. 88살의 자그마한 바르다는 화려한 색의 치렁한 옷과 장신구를 좋아하고 33살의 키다리 JR은 몸에 붙는 단색 차림을 고수한다. 감독은 느릿하고 사진가는 조바심을 낸다. 남자는 여자의 투톤 염색 머리칼을 놀리고 여자는 남자의 검은 안경이 못마땅하다. 공통점은 시야의 제약이다. 바르다는 노화로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고 JR의 시야는 선글라스로 컴컴하다. 그러나 둘의 동행은 놀라운 시너지를 낸다. JR과 그의 팀은 사진 촬영과 설치를 담당하는 한편 바르다는 누구를 어떻게 찍을지 떠올린다. 본래 대도시에서만 작업했던 JR은 바르다에게 이끌려 평범한 노동자의 얼굴과 지역 환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심지어 장 뤽 고다르 감독을 어딘가 닮은 JR의 외모도 일종의 복선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