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다 망한다. 그러니까 같이 잘 망하자. 아름답게.” 올해 초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나와 봄날의 약속>은 이 괴상한 대사에 피식 웃다가 결국 설득당하게 되는 영화다. 지구 멸망 전날 생일을 맞이한 외로운 사람들에게 외계인들이 찾아가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고 간다는 발칙한 설정하에 세개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주인공들이 받게 되는 선물이 ‘아름답게 망하는’ 삶을 실현시킨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김성균이 “도대체 감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하기로 했다”고 할 만큼 비범한 시나리오를 쓴 백승빈 감독은 영미문학, 그중에서도 고전 낭만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창작자다. 학창 시절 어떤 책을 좋아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얘기는 너무 즐겁게 할 수 있다”며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고, 제인 오스틴을 무시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난다는 기자에게 “최고의 작가 중 하나”라며 신나게 맞장구를 쳤던 그와의 만남을 전한다.
-원래는 3명의 감독이 함께할 프로젝트였다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만든 내 첫 장편 <장례식의 멤버>(2008) 이후 다른 작품을 오랫동안 준비하다가 잘 안 됐다. 그리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영화 워크숍을 하다가 <수성못>(2017)의 유지영 감독과 <내가 사는 세상>(2018)의 최창환 감독을 만났는데, 우리끼리 단편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말이 나왔다. 당시에는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죽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은, 우울함을 전염시킬 수 있는 아포칼립스 영화를 소박하게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집중력도 요구되더라. 그사이 유지영 감독이 <수성못>을 찍게 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나머지 감독들은 하차하게 됐다. 그러다 지지난해 김형대 마일스톤컴퍼니 대표를 만나 한번에 같이 만들어 보자고 한 거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귀동 감독(강하늘)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3년째 붙잡고 있는 시나리오 내용이라는 설정인데, 이 파트가 거의 본인 이야기처럼 보인다. 인터넷에 뜨는 이귀동의 필모그래피가 실제 감독의 작품과 똑같지 않나.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한데, 처음부터 자기반영적인 느낌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한 그릇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하다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나중에 붙게 됐다. 사실 고생하는 예술가들을 보고 있는 게 즐겁지 않나. 나는 그렇다. (웃음) 지난 몇년 동안 결과물을 내지 못했을 때 가진 우울함, 분노,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익살이나 유머가 계속 뒤틀리면서 영화에 반영됐다.
-외계인 중 하나인 요구르트맘(이혜영)이 이귀동의 팬이라며 그의 세계관을 어차피 망할 거 아름답게 망하자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지구 종말’이나 ‘생일’같은 영화의 주요 설정을 보면 이 역시 감독의 평소 생각과 비슷할 것 같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요즘 세상에서 비극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비극(tragedy)과 코미디(comedy)가 결합된 ‘tragicomedy’ 같다고. 사람을 만나서든 창작물을 볼 때든 이슈를 대할 때든 모든 게 항상 우울하지만도 않고 즐겁지만도 않은 미묘한 태도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영화에 이상한 유머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관심 있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공상에 빠져 있는 10대 소년이 방구석에서 할 법한 것들이다. 책벌레 출신이라 정신적 뿌리가 그쪽에 있거든. 사실 영화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는 이귀동이 아니라 잔인한 그림을 그리고 반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여중생 이한나(김소희)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도 실제로 내가 다 그렸다. 나는 학교에서 왕따 가해자들의 머리통이 뽑히는 상상을 하며 그림을 그리던 학생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항상 아포칼립스를 생각할 거라 본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냥 끝나기보다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관한 레이어를 추가하고 싶었다. 그냥 영화 일을 하지 말까 생각하고 고향에 내려간 시절도 있었지만, 윤성호 감독의 권유로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를 함께한 기억이 너무 좋아서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경험도 있고. 그게 ‘생일’이라는 설정에 반영된 거다. 영화에 나오는 생일자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누구와 함께 생일을 보내지 못했을 것 같은 사람들로 뽑았다. 멸망하기 전에는 외계인들도 그런 사람을 찾아가고 싶지 않을까. 결국 ‘생일’과 ‘지구 종말’ 같은 키워드는 10대 시절부터 날 관통해온 취향의 근원 같은 거다. 내가 주눅들 때 항상 날 끌어당기는 것은 어렸을 때 날 만들었던 예술 창작품들이고,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어떤 작품들이었나.
=나는 영문학과 미국학을 전공하며 10~20대를 영미문학과 함께 보낸 독서광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예술은 대체로 고전 낭만주의 시대 작품이다. <나와 봄날의 약속> 두 번째 에피소드에 언급되는 존 던 등의 낭만주의 시인들, 오븐에 머리통을 넣고 자살했던 실비아 플래스, <프랑켄슈타인>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같은 작품들…. 예전에 만든 동명의 단편영화에 영향을 준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존 파울즈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문학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자기 파괴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그 시절을 보냈고 그들의 정신이 날 고무시킨다. 마음속에 있는 촛불 같은 작품들이다. 예전에는 문학 마니아라는 말을 하는 게 죄책감이 들고 주눅 들곤 했다. 중학생 때는 애들이 이상하게 봐서 <폭풍의 언덕>을 숨어서 읽었다. 나에게는 그냥 오락이었는데 말이다. 예전에 나왔던 세계 명작집들은 인류 정신의 에센스라고 생각한다. 뭔가 막힐 때마다 아픈 사람이 약을 찾듯이 보고 있는데,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요즘엔 이게 내 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디다스남(김성균)이 여중생 이한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짓궂게 위협을 가하는 장면이 담긴 에피소드나 전의무 교수(김학선)와 여대생(송예은)의 에피소드는 요즘 같은 시대에 아슬아슬해 보인다. 특히 전자는 4년 전에 다른 단편 프로젝트로 갖고 있었던 이야기를 만든 거라 시대의 변화를 고려하지 못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나온 어떤 작품들은 지금 나오면 난리가 날 거다. 하지만 만든 시기가 어땠든 간에 결국 내 안에서 나왔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맥락을 강조하며 관객의 감상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계적인 구도 자체에서 오는 불편함은 당연히 있겠고, 창작을 할 때 필터링을 거쳤어야 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다만 난 인간이 만나는 외계인들이 왜 그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아디다스남이 이한나를 어떻게 해코지하려는 게 아니라 해코지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시선과 싸우는 이야기다. 아슬아슬하고 무섭고 걱정되는 가운데 여중생은 계속 신경질을 내고 있지만 사실 아디다스남의 의도는 선물을 주고자 하는 것이고, 그 선물은 괴물이다. 괴물을 선물로 주는 존재라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상의 중년 남자여야 했다. 또한 김소희에게 상대 캐릭터에게 절대 지면 안 된다고, 싸워서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그 아슬아슬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심했다면 내가 섬세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학 교수가 여대생과 엮이고 결국 딥키스까지 하는 것도 줄거리만 보면 불쾌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상화된 것은 여성이 아니라 외계인이고, 주인공이 수십년간 낭만주의 시대와 형이상학적 문학 세계에 있던 중년 남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사랑이란 질병을 주는 외계인이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다. 낭만주의 시대의 남성 창작자들은 여성을 뮤즈로 소비하지 않았나. 에드거 앨런 포는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시를 썼다고 하고. 이런 게 마치 낭만주의 시대의 정신처럼 됐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굉장히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고수민(장영남)과 박미션(이주영)의 에피소드는 여성 운동가들이 주인공이다. ‘피의 자매들’이 모인 동아리방에는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설치고 말하고 떠드는” 등의 문구가 붙어 있다.
=고수민은 지금은 가사노동과 독박육아로 정말 힘들게 살고 있지만 원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자아가 강렬했던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후배 미션을 따라갔다가 예전처럼 극도로 올라온 에너지를 보여주게 된 거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을 ‘설치고 말하고 떠드는’으로 바꾸어 쓴 이유가 있나?) 그건 이러이러한 문구가 붙어 있으면 좋겠다고 책에서 봤던 문장을 미술감독에게 전달했는데, 그가 잘못 옮긴 것이다. 나중에 영화를 보니 벽에 붙어 있는 문구들이 너무 직접적인 것 같고, 화면에 담긴 내용물을 섬세하게 체크하지 못한 부분도 있더라. 만약 원래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이는 관객이 있다면 내가 섬세하게 톤 앤드 매너를 설득시키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의외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줄거리는 선명하다.
=아디다스남과 학생의 에피소드는 그토록 팔다리 많은 괴물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아이가 결국 그 괴물을 선물로 받아 실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각자 나름 생각할 부분이 있다. 대학 교수와 여대생의 에피소드는 건강하게, 외롭게 살던 남자가 결국 선물 같은 질병을 얻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고수민의 에피소드는 남편과 자식이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하고, 그사이에 잠시 나가서 담배 한대 피우고 싶은 여성의 이야기다. 후배의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이 그를 정신없이 끌고 가서 대리만족시켜준 것인데. 장영남씨는 영화를 찍고 나서 속이 후련했다고 얘기했다. 부조리한 코미디는 결국 톤 앤드 매너가 제일 중요하고, 그게 매력적인지가 승부처다. 조금이라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을 마무리하는 내 마지막 기분이 좋지 않을까.
-<장례식의 멤버>의 대사를 빌려서 묻겠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배우로서도 연출자로서도 좋아하는 조디 포스터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더라. 당신은 엄청난 커리어를 갖고 있는 사람인데 왜 연출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을 받자,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영화 연출을 한다고 답했다. 결국 나 역시 그게 창작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더라. 다만 가난한 영화학교 학생 시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중요시했다면,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들이 대체로 뒤틀린 미친 정신의 기록 같은 느낌을 갖고 있는데, 이런 게 좀더 관객과 많이 만날 수 있는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예전보다 많이 든다. 그렇게 레이어가 쌓여가는 것 같다.
-냉정하게 봤을 때 <나와 봄날의 약속>처럼 자기반영적으로 보이고 취향 타는 영화를 두고 어떤 관객은 ‘내가 이걸 왜 봐야 하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감독이 계속 차기작을 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봐줘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게 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
=<무서운 이야기3: 화성에서 온 소녀>(2016) 편집단계에서도 ‘괴랄’한 정서가 너무 마니아틱한 서브컬처라는 점에서 제작사와 부딪쳤는데,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장르영화라면 최대한 선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절대 나쁜 게 아니고, 거기에서 오는 쾌감은 장르영화가 꼭 가져가야 할 지점이다. 케이크 위에 장식품 하나 놓듯 여기에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이야기를 떨어뜨리면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나 <유전>(2017)같은 작품이 나오는 거다. 이런 영화를 보면 창작자로서 고무되고 자극을 받는다.
-영화 속 이귀동 감독은 외계인들에게 지구 종말 말고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고 말한다. 백승빈 감독은 어떤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있나.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의 신작 시나리오작가로 일한 프로젝트가 몇편 있다. 개인적인 작품도 있다. 좀 어둡긴 하지만 장르적으로 선명한 SF, 그리고 출간된 지 100년 정도 된 영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을 생각하고 있다. 대학 시절 읽었던 책인데 한국에서는 번역이 안 됐다. 그동안 본의 아니게 쉬어야 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가 너무 커서 작가 일도 연출 일도 열심히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