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은 정기적으로 10대 마틴(배리 케오간)과 만나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 둘은 무슨 관계일까? 따로 사는 부자(父子)? 비밀스러운 파트너? <킬링 디어>의 마틴을 연기한 배리 케오간은 <원더스트럭>(2017)의 밀리센트 시먼스, <유전>의 밀리 샤피로에 이어 스크린에 들어오는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신예다. <덩케르크>에서 애국심에 불타는 투명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 배우는 <킬링 디어>의 시커먼 심연이다. 마틴은 예의바르고 집요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모든 인물이 그렇듯, 흡사 인공지능 같은 딱딱한 말투로 괴상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할 때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다. 순진한 동시에 사악하고, 가련하지만 가까이하기 싫은 캐릭터를 배리 케오간은 제2의 피부처럼 연기한다. 소년은 현실적으로 극중 최약자이지만 때가 되면 영화 전체의 리얼리티를 교란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06/11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학교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을 빈손으로 카페에 보냈다고 한다. 반드시 필름에 찍을 필요는 없다면서. 그저 테이블에 자리잡고 몇 시간이고 앉아 고정된 프레임 안에 들고 나는 사람들과 사물을 지켜보라고, 그 가운데 찍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고. 이 일화를 듣고 나는 바르다에게 시네마는 만들기에 앞서 발견하는 예술인가보다 짐작했다. 시네마는 온 세상에 잠재돼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알아보는 눈과 정직한 해석이다. 아녜스 바르다는 사진가로 출발했다. 시네필도 아니어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도 데뷔작 편집을 도와준 알랭 레네가 알려준 덕택에 처음 가봤다. 첫 영화를 찍기 전에 본 영화가 몇편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요즘 바르다는 인터뷰에 따라 5편이라고도 하고 10편이라고도 한다. “매일 기억력이 다르다 보니…”라고 90살 감독은 시치미를 뗀다. “당시 다른 감독들은 안 본 영화가 없고 모르는 거장이 없었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걸작을 많이 봤다면 영화를 시작할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작가(auteur)이며 누구보다 사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바르다에게 시네마는 감독 1인의 비전을 자본과 인력을 동원해 실현하는 작업과 정반대 활동이다. 바르다의 <아녜스의 해변>(2008)은 책과 영화를 통틀어 내가 접한 자전적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에고가 엷은 작품이었다. 감독이 80살 된 해에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바르다의 예술적 업적’에 관심이 없다. 대신 그가 살았던 공간, 우정을 맺고 함께 영화를 만든 사람들, 그들과 공유한 시간을 끌어안으며 가지를 친다. 결과적으로 바르다라는 예술가의 초상은 직접 그려지지 않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의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2006년 열린 카르티에 갤러리의 전시회에서 바르다는 말 그대로 자신의 필름을 주렴처럼 늘어뜨리고 안쪽에 들어가 자연광에 비친 프레임들을 바라본다. 영화는 감독의 쇼윈도가 아니라 그 안에 거하는 집이라는 사실을 함축한 이미지다. 이와 같은 접근방식은 바르다의 극영화 중 널리 알려진 <방랑자>(1985)에서도 마찬가지다. 방랑하는 젊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모나(상드린 보네르)의 마지막 나날은 그를 잠시 스쳐간 사람들의 증언을 따라 구성되는데 그 과정에서 관객은 모나와 조우한 이들의 삶까지 일별하게 된다. 우연에 대한 개방성, 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하면서도 개인을 관계의 산물이자 총합으로 인식하는 사고, 인간이 이미지와 의미를 위해 움직이는 대신 이미지와 의미가 인간으로부터 도출되는 연출. 바르다에게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는 풍문에 불과하다. 실제로 뉴욕에서 “픽션과 다큐멘터리 중 어느 쪽 작업이 더 자유로운가?”라는 관객의 질문에 바르다는 차이가 없다고 답했다. 다큐멘터리도 픽션도 바르다를 만나면 하릴없이 최고의 에세이로 귀결된다.
06/12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아녜스 바르다가 믿는 예술의 이상을 한데 모은 포트폴리오다. 1955년 데뷔작을 만든 이래 바르다 최초의 공동연출작인 이 프로젝트의 짝은, 대형 인물 사진을 도시 벽면에 설치하는 작업을 해온 포토그래퍼 JR이다. 30년의 나이 차와 대략 30cm의 키 차이가 있는 듀오는 즉석 현상 포토트럭을 몰고 프랑스 곳곳을 다니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대형 사진을 찍어 그들이 생활하고 노동하는 장소 외벽에 바른다. 여기엔 연출자의 태도가 있을 뿐 계획은 없다. 바르다의 주된 역할은 큐레이터이며, 유연한 의미의 ‘내러티브’가 바르다가 쓴 내레이션과 편집으로 후반작업 단계에서 부여된다. 감독들이 만나고 촬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집적해 영화의 스토리를 이루고, 여행 중 진화하는 바르다와 JR의 관계가 영화의 정서가 된다. 이 영화의 (넓은 의미의) 저작권은 근사하게 흩어져 있다. 한편 여러 대의 카메라와 스탭이 동행하지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자본의 사전 승인으로부터 자유롭다. 결과물인 사진은 모델과 공동체 구성원에게 공짜로 제공된다. 역으로 모델이 된 시민들도 (다분히 프랑스적인) 예술에 대한 근본적 긍정을 보여줘 부러움을 자극한다. 편집된 푸티지가 있을지 몰라도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초상권을 따지거나 사유재산 침해라고 삿대질하거나 먹고살기 힘든데 무슨 신선놀음이냐는 불쾌감을 표하지 않는다. 동료들의 대형 단체 사진이 화학공장 벽에 나붙은 날, 출근길의 한 노동자는 흠칫하더니 곧 선선히 “예술은 원래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이죠?”라고 촬영진에게 되묻는다. 남자의 말은 미학개론 교과서에서 밑줄 그었던 예술의 정의와도 멀지 않았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 행여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 영화 초반 모델로 등장하는, 폐쇄된 탄광촌의 재닌은 퇴거를 끝까지 거절하고 평생 살아온 장소에서 버티는 중이다. 바르다와 JR은 재닌의 커다랗고 당당한 초상을 집 정면(façade)에 바른다. 본인의 커다란 이미지를 열고 걸어 나온 재닌은 뒤돌아서 결과물을 본 순간 그만 글썽인다. 사진이 그의 인생과 공동체가 버텨온 시간에 합당한 위엄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돌려줘서일 거다. 재닌의 떨리는 어깨는 부단히 지키고자 했으나 실체를 만질 수 없었던 긍지를 마침내 이미지로 손에 넣은 인간의 감격이다. 한편 남성 노동자로 가득한 르아브르 항구에서 바르다는 페미니스트답게 여자들은 어디 있는지 묻고, 부두 노동자의 아내이자 스스로 노동자인 세 여성을 모델로 택한다. 두 감독은 세 여자의 사진을 컨테이너로 쌓은 벽에 바르고 사진의 가슴께 컨테이너를 열어 세 모델을 앉힌다. 세 남편은 아내들의 이미지에 경이감을 드러내며 마치 여신들에게 경배하듯 컨테이너를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긍정적 반응이 전부는 아니다. 어느 마을 카페의 종업원은 동네 어귀에 붙은 자신의 대형 사진이 동네 명물이 되자 불편해한다. 한편 그의 두 남매는 엄마의 크고 예쁜 이미지 앞에서 즐거워한다. 요컨대 환경의 바르다와 JR의 초상 사진은 피사체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고, 이웃이 모델이 된 이웃을 다시 발견하게 만들며 마지막으로 감독이 본 것을 관객과 공유한다. 여기서 ‘보다’의 의미는 시각 이상이다. 영화 말미 내내 고집하던 선글라스를 벗고 드디어 맨 얼굴을 보여주는 JR에게 노환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감독이 말하는대로다. “당신이 잘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봐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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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술
작아지는 재주가 앤트맨(폴 러드)의 유일한 능력이라면, 슈퍼히어로로서 복수의 영화를 끌고 갈 밑천이 부족하다. 앤트맨의 슈퍼파워는 자유자재로 -아니 때때로 오작동하면서- 본인과 사물의 크기를 바꾸는 기술이고, <앤트맨과 와스프>는 영화 한편을 통째로 이를 입증하는 데 쓴다. 격투 상황에서는 상대의 공격이 작렬할 때 작아지고 반격할 때 커져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자동차 추격전에서는 운전 실력을 겨룰 일 없이 미니카가 되어 다른 차 밑으로 들어가면 만사형통이다. 동일한 능력을 가진 와스프(에반젤린 릴리)와 앤트맨은 크고 작음을 바꿔치며 다양하게 로맨틱한 그림을 만든다. 극단적 축소와 확대만이 재미를 주는 건 아니다.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제일 참신한 대목은 인물이 애매하게 작아진 장면이다. 성인의 비율을 유지하며 어린이의 체구가 된 폴 러드의 코미디는, 배우의 어른아이스러운 개성과 맞아떨어져 미소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