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좀더 친하게 지냈어야 하는데.” 기자들끼리는 종종 그런 얘기를 하곤 한다. 영화제에서 무명일 때 만난 감독이나 배우 같은 게스트가 어느 날 유명해지면 괜한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제는 <대니쉬 걸>(2016)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로 정점을 찍으며 할리우드 톱스타가 된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조국인 스웨덴영화 <퓨어>(영화제 개봉 제목 <순수 소녀>)가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초청되어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딱히 인터뷰도 없고 스케줄도 없어서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겼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당시 리자 랑세트 감독이 갑자기 출산을 하게 되면서 신인배우 혼자 부산을 찾았던 것이다. <제이슨 본>(2016) 개봉 당시 홍보차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던 그녀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배우로서 처음 초청받은 해외 영화제가 부산국제영화제였다”며 “그때 해외 영화제의 설레고 좋은 기운을 처음 받고 배우로서 힘을 내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깍듯한 인사까지 덧붙였다.
당시 <씨네21> 데일리 인터뷰 기사를 보자면, ‘평소 좋아했던 같은 스웨덴 출신 감독 호콘 리우의 <미스 키키>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아(플래시 포워드 부문 특별언급) 부산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한국영화가 보고 싶어 예매하려고 했는데 매진되어 아쉬웠다’고도 했다. 또 놀라운 것은, 같은 해 배우 톰 히들스턴도 첫 주연작인 <섬들>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부산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마찬가지로 해외 영화제에 가보고 싶다는 이유로 자비를 들여서 왔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해운대 야외무대에서 ‘부산에서 만나는 유럽 영화인’ 행사에 알리시아 비칸데르와 톰 히들스턴이 구석에 서서 설렘 반 긴장 반의 표정으로 사진 찍힌 모습은 참 묘한 느낌을 준다. 그런 오래전의 인연과 의리 때문인지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퓨어> 이후 <호텔>(2013)과 <유포리아>(2017)까지 리자 랑세트 감독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고, 톰 히들스턴 역시 <섬들>을 비롯해 <언릴레이티드>(2007)와 <엑시비션>(2013)까지 조안나 호그 감독의 모든 연출작을 함께했다. 그래서 “그때 알리시아 비칸데르 인터뷰했던 기자가 누구야?”(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톰 히들스턴은 왜 인터뷰 안 했어?”(그땐 그런 배우가 있는지도 몰랐지) 하는 얘기를 뒤늦게 주고받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감독은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나이트 워치>로 초청됐던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이다. <나이트 워치>는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특수효과, 그리고 판타지 장르를 표방한 블록버스터급 규모로 자국영화 점유율이 10% 정도에 머물러 있던 당시 러시아 박스오피스에서 흥행 최고 기록을 세운 영화다. 당시 그와 인터뷰가 끝났을 때, 이후 스케줄이 없다는 그가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하여 분식집에서 밥도 먹고 거의 하루 종일 <올드보이>(2003)를 비롯한 한국영화 얘기도 한참 나눴던 기억이 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생긴 그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딱히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지는 못했는데, 몇년 뒤 그가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원티드>(2008), <링컨: 뱀파이어 헌터>(2012) 같은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연출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냥 인터뷰 한번 한 사이에 불과하니 ‘그때 좀더 친하게 지낼걸’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 것은 아니지만, 최근 <벤허>(2016)까지 연출하는 걸 보면서 어쨌건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벤허>의 실패를 보면서는 더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긴 할리우드 생활을 끝내고 직접 연출, 각본, 제작을 맡은 <프로필>이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관객상을 받은 것을 보며 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냥 그 모든 것들이 영화제의 추억이 된다. 그렇게 올해 부천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