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출연 힐러리 스왱크, 클린트 이스트우드 / 제작연도 2004년
떠돌이 개처럼 마음 가는 대로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던 10대 시절, 우연히 찾아가게 된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만약 그곳이 정감 있는 형, 누나들이 있는 요리학원이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음식 만드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수수께끼 같은 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곳,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숨어들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다. 새롭고 낯선 장소에 가득한 영화에 대한 이상야릇한 열기도 처음 경험해보는 분위기였다. 막연하지만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고 사람들로부터 얻은 의식의 환기는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세상까지 조금 달라 보이게 했다. 당시 나는 중국집, 횟집, 치킨집, 비디오대여점을 전전하며 배달부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빈 그릇을 수거하기 위해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문득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각성이 들었다. 수거할 그릇은 몇개 남지 않았고 하루 종일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은 시원한 바람에 마르고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힘차게 계단을 박차고 올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문화학교 서울은 학교를 뛰쳐나온 내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혼자였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충만해졌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매기(힐러리 스왱크)도 그렇게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육관으로 흘러왔을 것이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시작한 권투. 그는 집을 나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막연하게 권투가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140kg이 넘는 거구의 엄마, 감옥에 간 오빠, 아빠 없는 아이를 키우는 여동생이 있지만 낡은 트레일러에 한데 모여사는 가족은 그의 꿈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 그들에게도 삶은 생존 투쟁의 장일 뿐이다. 32살 생일을 맞이한 매기가 끼니를 거르며 모은 돈으로 산 스피드백(펀치볼)을 자신에게 선물하던 날. 8년동안 공들였던 선수 윌리가 프랭키를 떠나 새로운 매니저를 찾아 챔피언으로 등극하던 날. 두 사람은 늦은 밤 텅 빈 체육관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생일이라고? 몇살이 된 거지?” “32살요. 13살부터 시작한 식당 종업원 생활에 또 한해를 더한 거죠.” 프랭키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삶을 절망이라도 하듯 힘겹게 주먹을 내젓는 매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 장면은 몇번을 보더라도 어김없이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차오른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 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일 때, 세상에서 단 한명 나의 편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고 우리를 살아내도록 한다. 프랭키는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돌보듯 매기에게 처음부터 다시 권투를 가르친다. 첫 번째 규칙, 항상 너 자신을 먼저 보호해야 해. 그것은 인생을 배우는 것과 같다. 매기는 결국 재능을 꽃피우고 둘은 서로에게 핏줄과 같은 존재가 된다. 모쿠슈라.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무엇이든 부여잡으려고 허공에 주먹질을 하듯 좌충우돌하던 때가 생각난다. 내게도 프랭키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스쳐 지나가며 한마디씩 해주었던 시네마테크의 형과 누나들, 엉망진창이었던 나를 기꺼이 거두어주었던 영화학교의 스승들. 그리고 나의 심장과도 같은 동료들과 영화를 만들면서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세상과 싸웠던 매기에게 권투가 있듯이 내게도 아직 영화가 있다.
장건재 영화감독. 영화사 모쿠슈라 소속이며 장편영화 <회오리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를 만들었다. 현재는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영화화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