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신의 손
2018-07-25
글 : 김혜리

*<킬링 디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빅 식>

스크린 속 7월의 엄마는 홀리 헌터다. <인크레더블2>의 일라스티걸 목소리 연기를 한 그는 <빅 식>에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진 딸(조 카잔)을 돌보러 달려왔다가 말로만 듣던 딸의 몹쓸 전 남자친구(쿠마일 난지아니)와 마주치는 엄마 베스다. 홀리 헌터와 레이 모라노가 연기하는 부부는, 중반 등장 이후 이 사랑영화를 주인공 커플로부터 탈취하다시피 한다. 배우 특유의 알사탕을 볼에서 굴리는 듯한 발성, 안경 너머로 탐색하는 듯한 눈, 거구의 남편 주변을 맴돌며 지휘하는 단호함. 베스는 자식을 보호하려는 결연한 의지로 깃을 세운 작고 야무진 새 같다. 그리고 최고의 엄마로서 그가 지닌 힘은 자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딸에게 상처를 준 쿠마일을 탐탁지 않아 하던 베스는, 막상 그가 공연하는 코미디 클럽의 어느 인종주의자 청중이 “ISIS로 돌아가라!” 며 야유하자 육탄전을 불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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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중산층 가족이 아버지가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복수하려고 다가온 외부자에게 위협받는다. <킬링 디어>의 설정은 <퍼시픽 하이츠> <케이프 피어> 등 199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한 일군의 스릴러와 비슷하다. 단 <킬링 디어>의 마틴(배리 케오간)은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의심되는 심장외과의사 스티븐 머피(콜린 파렐)의 윤택한 생활을 가로채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바는 동등한 상실을 스티븐에게 끼치는 마이너스의 균형이다. 실업자 엄마(알리시아 실버스톤)와 남겨진 16살 소년은 법과 제도에 호소해 의료사고 배상을 받고 책임자가 메스를 놓게 하는, 정당하고 실리적인 길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 작은 미스터 함무라비의 셈법은 무시무시하게 간단하다. (기혼인 건 당신 사정이고) 당장 아버지 자리를 채워주거나, 1안이 여의치 않으면 아내 애나(니콜 키드먼)와 두 자식 중 한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 누가 신성한 사슴이 되어 제단에 올려질지 스티븐 본인이 정해야 한다는 것도 죗값의 일부다. 오히려 죄지은 스티븐의 생명은 마틴에게 쓸모가 없다. 죽으면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마틴의 법을 확실히 인지시키기 위해 매우 설명적인 장면까지 일부러 넣었다. 스티븐의 팔뚝을 물어뜯은 마틴은 비명을 지르는 스티븐 앞에서 “봐. 지금 당신의 기분을 낫게 해주는 일은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행위가 아니라 이렇게 내 손목을 똑같이 물어뜯는 거야”라고 시범을 보인다. <킬링 디어>는 복수의 불가피함과 무자비한 작동 방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면하려는 비굴한 몸부림을 노골적으로 망라하는 데에 집중한다. 반면 마틴 가족의 불행에 실제로 스티븐이 어떤 책임이 있는지, 소년의 정의와 스티븐 가족에게 닥치는 재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대안도 모색되지 않는다. 현실이라면 극단적 선택 전에 스티븐은 차라리 마틴의 아버지가 되어 가족을 살리는 방법을 고려하거나, ‘소피의 선택’을 아예 하지 않는 편을 고민할 법하지만 <킬링 디어>는 외길만 간다.

<스토커>에 출연했던 니콜 키드먼이라는 공약수는 박찬욱의 복수영화도 떠올리게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오래도록 매달린 복수의 함의는 <킬링 디어>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차라리 돌연 몸에 찾아온 징벌 앞에 좌충우돌하는 <박쥐>가 닮았다. <올드보이>의 사설 감옥과 기억상실증도 란티모스 감독이라면 지나치게 산문적 설명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킬링 디어>에서 복수는 그냥 행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집요했던 과정에 비해 복수의 완수로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틴도 살아 있는 개인이라기보다 잔혹한 신의 현현에 가까운 캐릭터다. 심장외과의라는 스티븐의 직업 역시 인간계에서 신에 해당하는, 생사를 직접 손으로 주무르는 일이다. 극중에서 그의 손에 대한 예찬이 민망하리만큼 반복되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소년과 관계가 아직 우호적인 도입부에서 스티븐은 다소 뜬금없이 손목시계를 선물한다. 마치 시간(삶)을 통제하는 힘을 마틴에게 넘기는 의례처럼. 이후 마틴이 극중에서 전능한 자의 자리에 온다. 신에 대한 언급은 스티븐이 마틴의 집을 방문했을 때 TV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블랙홀>의 대사에도 섞여든다. “당신이 신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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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암시하는 <킬링 디어>의 모티브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다. 스티븐의 딸 킴(래피 캐시디)은 이피게네이아의 설화를 주제로 에세이를 제출해 수업에서 최고점을 받는다. 처녀신 아르테미스의 수사슴을 해치는 바람에 진노를 산 아가멤논 왕에게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면 트로이로 출정할 함대의 돛에 바람을 주겠다는 신탁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신화의 끝은 영화만큼 잔혹하지 않다. 아르테미스는 마지막 순간 암사슴으로 제물을 대신하고 구름으로 이피게네이아를 감싸 신전에 데려가 사제로 삼는다. <킬링 디어>의 카메라는 신의 시선을 가정하는 모양새다. 눈높이를 피해 조금 높거나 낮게 잡은 와이드숏에는 천장이나 바닥이 넓게 담겨 인물을 미물처럼 표현한다. 극중 공간은 종종 오페라 극장 발코니석에서 내려다본 희비극의 스테이지처럼 보인다. 이 가운데 극단적 케이스는 아이가 쓰러진- 징벌이 시작되는 순간이다-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수직 부감으로 내려다보는 깊은 조감숏이다. 머피네 집과 마틴과 스티븐 가족이 다니는 식당의 천장에는 대형 팬이 시간을 새기며 규칙적으로 돌아간다. 무심하고 냉혹하게. 거대한 종합병원을 돌아다니는 뱀처럼 긴 트래킹숏은 즉각적으로 <샤이닝>의 낮은 자전거 시점 트래킹숏을 연상시킨다. 하긴 거칠게 보면 <샤이닝> 역시 가부장인 아버지가 가족의 네메시스가 되는 이야기다. 물론 스탠리 큐브릭에게 있어서, 악마는 가족을 삶의 짐이자 훼방으로 여기는 남성 예술가의 무의식 안쪽에 잠재돼 있었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킬링 디어>는 작게는 포스터까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의 일관성을 실현하는 신작이지만 내게는 이행기의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란티모스 감독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장편인 <송곳니> <알프스> <더 랍스터>는 초현실적 세팅으로 현실 세계의 파시즘, 언론 통제, 롤플레잉으로 운영되는 문화, 이성애 커플링의 사회 생태계를 풍자했다. 달리 쓰면, 현실을 우화의 프리즘에 투과시켜 본질을 직면하게 만드는 시도였다. <송곳니>는 완벽히 고립된 가정, <알프스>는 망자 대역 서비스 회사, <더 랍스터>는 짝짓기 호텔이라는 밀봉된 우주를 가정하고 실험을 진행하고 역설적으로 그래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리얼하다. 반면 <킬링 디어>는 평범한 열린 세계에서 란티모스 특유의 (불친절한 시리 같은) 단조로운 대사 톤과 현실을 초월하는 사건을 밀어붙인다. 그래서 인위성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전작이 현실로부터 원형을 추출했다면, <킬링 디어>는 신화의 간결성을 모방하기 위해 현실을 우그러뜨린 이야기로 보이는 것이다.

<주피터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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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피터 어센딩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은 한폭의 종교화 같은 결정적 한컷에 일가견이 있다. 탈주한 개들의 무리가 소녀의 트럼펫 연주에 일제히 편히 눕는 신비한 이미지로 전작 <화이트 갓>(2014)을 마무리했던 문드루초는, 신작 <주피터스 문>에서 헝가리 국경 수비경찰의 총에 맞은 시리아 난민 아리안(솜버 예거)에게 공중부양 초능력을 부여한다. 영화는 그가 나는 모습을 비행보다 유영에 가깝게 표현한다. 남자는 풍선처럼 천천히 떠오르고 하강하고 떠다닌다. 중력도 통제하지만 좁은 공간에 한정된다. 아리안의 파워는, 전투적 물리력이 아니라 충격이자 영감으로서 작용한다. 돈과 시간에 쫓겨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일을 잊은 동시대 사람들이 하늘로 시선을 돌리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슈퍼히어로 시대의 난민영화가 선택한 깃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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