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위해 예술작품 앞에 서는가? 사람들은 왜 예술작품을 찾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흐의 구두 그림을 빌려온다. 관객은 구두 그림 앞에서 구두뿐만 아니라 그 구두가 디뎠을 대지를 볼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구두를 무심하게 보고 지나치지만 구두가 예술작품으로서 응시를 요구할 때, 구두에 담긴 대지와 시간이 드러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드레 바쟁 또한 이 점을 지적한다. 바쟁에게 영화는 예술이 되기 위해서 루돌프 아른하임이 주창했던 것처럼 사물을 왜곡하는 카메라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사물을 그대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힘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 꺼려한 바로 그 이유(카메라를 통한 대상의 기계적 복제)가 바쟁에게는 바로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요소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 스펙터클로부터 삶을 보호하는 것
그렇다면 <한나>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한나(샬롯 램플링)의 얼굴을 비롯한 한나의 몸, 클로즈업된 얼굴의 미세한 표정들. 말하자면 브레히트가 연극의 본질이라 부른 게스투스, 즉 몸짓들. 물론 이런 몸의 영화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일찍이 고다르나 로메르와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에서 이런 경향이 발생했다. 보통의 대화 장면에서 카메라는 말하는 배우를 비추지만, 이들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말을 듣는 이들의 얼굴을 계속 보여주고, 말은 화면 밖 음성으로 흘러나온다. 이때 관객은 말하는 배우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에 반응하는 배우를 보게 된다.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얼굴, 즉 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나의 살인사건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살인자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 혹은 살의 같은 것들이 드러나는 시점이 있을 것이다. 이때 살인은 이미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그 후에는 칼을 사용하는가, 로프를 사용하는가 따위의 부차적인 문제들이 남는다. 그런데 이 부차적인 문제들은 스펙터클이 되어 사건의 본질을 가리고 자신이 본질인 양 행세를 한다. 타락한 스펙터클로부터 삶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한나의 얼굴로 돌아가자. <한나>를 통해 한나의 몸짓을 본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한나의 얼굴과 몸짓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나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불편한 기색이 있다. 한나는 고독하며 동시에 일종의 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나에겐 혼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동시에 한명의 개인으로서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이와는 정반대로 한나를 이끈다. 개인으로서의 삶은 없으면서 한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한나의 신경증은 이런 세계에서 기인한다. 즉, 이 신경증은 세계의 병증에서 비롯되었다. 영화의 끝부분에 나오는 고래의 사체 또한 이 점을 암시한다. 이 죽은 고래는 한나의 죽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세계의 위기를 증언하고 있다.
연극은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몸짓이다
한편 <한나>는 그저 몸짓을 보여주며, 설명하지 않기에 관객은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 <한나>에서 중요한 사건은 한나의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된 바로 그 이유다. 한나가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이 점을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정황을 봤을 때 남편이 아동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불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한나가 발견하게 되는 봉투에는 범죄의 강력한 증거이자, 범죄 그 자체인 사진이 있을 거라고 추측되지만 영화는 그 사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사진을 보는 한나의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그런 한나의 모습을 본다고 해서 한나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아니, 애당초 한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자기소개를 열심히 한다 해도 그 자기소개는 나 자신을 배반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소개에 담길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자신의 복잡함과는 반대로 우리는 너무도 쉽게 타인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한나>는 이런 좁은 이해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의 무력함과 이해의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나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에 설 수 있다. <한나>는 관객에게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직시하기를 요구한다.
한나 또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나는 아들을, 남편을, 그리고 자신마저 알지 못한다. 한나가 겪는 고독의 근본적인 이유다. 한나의 연극은 이런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한나는 연극 수업이 끝난 뒤 지하철에서 맞은편 여자의 몸짓을 관찰한다. 연극은 한나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수단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한나는 세계를 하나의 연극으로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말미에서 한나는 아들에게 문전박대 당했으며 다시는 찾아오지도, 연락하지도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남편에게, 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아들이 곧 면회를 올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한나는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범죄의 증거인) 사진이 담긴 봉투를 찾았노라고 말한다. 한나의 거짓말은 위로가 아니라 복수다. 남편은 이전에 자신이 누명을 쓴 피해자인 양 거짓말을 했고, 한나는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이제 남편은 아들과의 화해라는 희망을 가질 것이고, 그 희망은 남편을 파괴할 것이다. 한나도 남편도 모두 무엇인가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나가 연극을 통해 깨달은 것은 삶 자체가 연극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여러 배역을 맡은 연극배우와 다름없으며, 배역 없는 배우란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역할을 떠난 ‘나’라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한나는 더이상 연극을 할 수 없게 된다.
고정된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배역을 수행함으로써 타인이 될 수 있으며, 타인 또한 내가 될 수 있다. 영화는 한나의 연극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을 보여주거나 지하철 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 등 예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또한 한나도 자신이 돌보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예술은 근원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이며, 세계와, 다른 몸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예술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역량이기도 하다. 한나가 연극을 시작하며 타인의 몸짓을 관찰하듯이, 우리는 한나의 몸짓을 관찰함으로써 한나와 연결된다. 또한 한나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한나들과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수많은 나 자신들과 연결된다. <한나>는 이해만이 타자와 함께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