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주성철 편집장] 황현산 선생을 추모하며
2018-08-10
글 : 주성철

스티븐 시걸 영화 중에 <복수무정>(Hard to Kill, 1990)을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어느 고위 정치인의 부패와 살인 음모를 알아낸 LA 형사 메이슨 스톰(스티븐 시걸)이 갑작스런 습격을 받아, 외부에는 죽었다고 알려진 채 무의식 상태로 7년을 보낸 뒤 깨어나 복수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돌이켜보면, 영화 포스터나 비디오 재킷에 “범죄는 질병이지, 이제 치료제를 만날 때다”라고 했던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코브라>(1986)나 “네놈을 살려두긴 쌀이 아까워” 라고 했던 척 노리스 주연의 <스트롱맨>(The Hitman, 1991), 그리고 처음에는 “건드리면 끝장이다”라고 했다가 흥행이 잘되니까 포스터 문구를 “건드려서 끝장냈다”로 바꿨던 돌프 룬드그렌의 <다크 엔젤>(1989) 등 아날로그 ‘하드 보디’ 액션히어로들의 화려한 시대가 있었다.

왜 느닷없이 철지난 B급 액션영화의 추억에 빠져들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비디오로 그저 재밌게 본 뒤 완전히 잊고 살았던 <복수무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준 이가 바로 고 황현산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2012년에 내놓은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에 ‘절망의 시간 또는 집중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글에서 그는 타란티노의 <킬 빌>과 <복수무정>을 예로 들며 ‘복수의 서사’에 대해 얘기한 적 있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산 자의 억울함과 죽은 자의 복수라는 주제의 원형”이라고 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유령 복수담의 전형”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까지 두 영화와 결부시켜, 복수의 서사에서 종종 다뤄지는 “죽음의 체험에 관통된 삶”이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저 두 영화의 주인공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형식상 죽음 이전의 삶을 죽음 이후의 삶에 연결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동일성에 심각한 변화를 겪는다”며 “<킬 빌>의 우마 서먼과 <복수무정>의 스티븐 시걸은 제가 살던 땅에서 다른 땅의 인간으로 산다. 이들 두 주인공은 사무라이가 되고 닌자가 되어서만, 사람이 아닌 사람이 되어서만, 환상적인 복수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복수의 환상에 성공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킬 빌>의 우마 서먼과 <복수무정>의 스티븐 시걸 모두에게 복수는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장르영화를 보며 ‘환상적인 복수’라고 생각했던 결말이 어쩌면 ‘복수의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맨 마지막에 “복수는 무정하다”고 썼던 그 글이 가슴에 크게 와닿았는데, <Hard to Kill>이라는 원제를 영화업자들이 홍콩 누아르스럽게 바꿔버린 그 제목 자체가 거대한 결론이었던 셈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클래식과 <복수무정>이라는 B급 액션영화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그 시선도 좋았다. 얼핏 ‘무리수’처럼 느껴지는 접근법도 결국 ‘잘 쓰면’ 통하는 법이다. 2013년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내고 <씨네21>과 인터뷰를 가졌던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 봉준호”라며 “언젠가 봉준호론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걸 읽지 못하게 된 것은 남은 우리의 안타까움이지만, 그가 그 책에서 <살인의 추억>을 ‘기억’이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짧게 쓴 글이 있다. “윤리는 기억”이라며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밤이 선생이다>는 지난해 고 노회찬 의원이 청와대 오찬 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에게 <82년생 김지영>과 함께 선물한 책이기도 하다. 갑작스레 내게 거대했던 두 사람을 떠나보내 황망하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을 두고 황현산 선생이 마무리했던 문장이 요즘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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