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팝스타, 휘트니 휴스턴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휘트니>가 개봉했다.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옹과 더불어 ‘팝의 여왕’이라 불렸던 휘트니 휴스턴은 목소리 하나로 미국 음악계를 평정한 위대한 뮤지션이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가족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영화 <휘트니>는 그녀와 가까웠던 지인들과 수많은 미공개 자료를 통해 휘트니의 명암을 전한다. 미국 대중음악계 최초의 ‘디바’는 어떻게 정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어떻게 무너져내렸나. 여기에 그 실마리가 있다.
만들어진 천재
휘트니 휴스턴은 1963년 8월 9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가스펠 가수였던 어머니 시시 휴스턴을 비롯해 오빠 마이클, 디온 워릭과 디디 워릭 등의 친척까지 휘트니 휴스턴의 가족 중에는 가수가 많았다. 다큐멘터리 <휘트니>는 휘트니 휴스턴이라는 팝의 전설을 만든 건 예리한 기획력의 부모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휘트니의 아버지 존과 어머니 시시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흑인 가수가 성공하려면 백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걸 직시했다. 그들은 딸에게 백인의 문화를 교육시켰고, 바람직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예쁜 외모의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인이 생각하는 ‘스위트 하트’의 모습이었다. 1985년 데뷔 음반 《Whitney Houston》을 발매하자마자 휘트니 휴스턴의 인기는 고공행진했다.
<보디가드>의 성공
휘트니 휴스턴의 첫 영화 <보디가드>(1992)의 대성공은 그녀를 엔터테이너 반열에 오르게 했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I Will Always Love You>는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14주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키스 신은 <보디가드> 이전까지 주로 백인 여자배우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에서 흑인 관객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디바’라는 수식어로 불린 최초의 팝 뮤지션
그래미상 6회 석권, 7회 연속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누적 음반 판매량 1억7천만장…. 휘트니 휴스턴이 미국 팝음악의 역사에 남긴 기록은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흑인 여성 가수로서 미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선례는 재닛 잭슨, 애니타 베이커 등 후대의 걸출한 흑인 여성 뮤지션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휘트니 휴스턴은 대중문화계에서 최초로 ‘디바’라는 수식어(이전까지는 주로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를 일컫는 말이었다)를 얻은 뮤지션이었다. <LA 타임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해 “20세기 팝 위에 세워진 기념비와도 같다”고 평하며 “휘트니가 최상의 컨디션일 때는 그녀의 크고 깔끔하며 청량한 메조 소프라노톤의 목소리에 견줄 자가 없다”고 말했다.
바비 브라운, 그리고 로빈 크로퍼드
휘트니 휴스턴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있다. 남편이었던 바비 브라운과 절친한 여자친구 로빈 크로퍼드다. 휘트니는 1989년 솔트레인 뮤직 어워드에서 댄스 가수였던 바비 브라운을 만났고, 3년의 연애를 거쳐 1992년 결혼했다. 하지만 바비 브라운은 외도와 폭행으로 휘트니에게 상처를 주었고, 두 사람은 결혼 14년 만에 이혼했다. 한편 로빈 크로퍼드는 16살 무렵부터 휘트니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레즈비언이었던 로빈의 정체성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로빈은 휘트니의 권위적인 아버지 존과 충돌하다 휘트니를 떠났고, 이후 휘트니는 점점 더 마약에 의존했다. 어쩌면 로빈 크로퍼드와의 결별은 휘트니 휴스턴에게 몰락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