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정세랑 소설가의 <아이, 토냐> 미워하기 좋은 여자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2018-09-11
글 : 정세랑 (소설가)

감독 크레이그 질레스피 / 출연 마고 로비, 세바스천 스탠, 앨리슨 제니 / 제작연도 2017년

봄에 <아이, 토냐>를 보았는데, 볼 때는 매끄러운 영화라 생각했지만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에 잔여물이 남았다. 어쩐지 아주 오래 이 영화를 생각할 것 같다.

1994년 당시 초등학생이었기에 한창 신문 스크랩이 숙제였고, 스포츠 섹션에서 토냐 하딩에 관련된 기사를 오려냈던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다. 내용이 충격적이어서 잊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후 미국의 온갖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 사건에 대해 비틀린 농담을 하고 흉내를 냈기 때문에 되새김질된 게 아닌가 한다. 20년이 넘도록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회자된 셈이니, <아이, 토냐>가 지난 세기말로 돌아가는 방식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영리해야만 했다. 수많은 적대자들을 비껴 가해자의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토냐 하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묘한 방식을 취해야 했던 것이다.

학대와 배제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이 블랙코미디를 보고 웃다가 굳어버릴지도 모른다. 가정 내의 가학적이고 비인간적인 학대가 사람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에 대해 건조하고 시니컬하게 보여주어 오히려 더 충격적이다. 어떤 사람은 끔찍한 환경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방도를 발견하고 멀리, 높이 날아 벗어나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러길 기대할 수는 없다. 특히 지속적인 학대가 마음속의 균형추, 어떤 것이 정상인지에 대한 감각 자체를 훼손시킨다면 더욱 어려워진다. 토냐 하딩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가혹한 양육자에게서 벗어나, 결국 못지않게 폭력적인 연인에게 향하면서도 그것이 정상이라고 받아들여버린 삶이었다. 연인이 배우자가 되고 다시 전남편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망가뜨릴 때까지.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액셀을 성공시켰을 만큼 실력이 있었지만, 토냐가 풍기는 어떤 비정상성은 피겨스케이팅계의 배제를 부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토냐(마고 로비)가 심사위원 중 한 사람에게 윽박지름에 가까운 호소를 할 때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평가해줄 거냐는 토냐의 말에 심사위원은 당신은 미국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라고 대답하며 외면한다. 이질적인 외부 진입자가 어떤 보수적인 계(界)의 중심으로 나아가려 할 때 끝없이 맞닥뜨리는 배제에 대해서 그토록 잘 표현된 장면이 또 있었는지 싶다. 영화의 종반부에 가면, 그렇게 따로 떼어두고 모두가 미워했던 여자가 사실은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닮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토냐는 낸시 케리건 피습에 대해 알았을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다. 알려진 것처럼 비윤리적인 인간이고 이제 와 자기 이야기를 팔려는 기회주의자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건 이후에 실제 일을 저지른 자들보다도 토냐를 더 맹렬히, 스포츠에 가깝게 미워했던 미국을 가차 없이 보여줌으로써 묻는다. 미워하기 이토록 좋은 여자를, 아무 브레이크 없이 미워했을 때 아주 신이 났었던 건 아닌지? 영화는 그렇게 우습고 끔찍하고 복잡한 거울이 된다.

다음 토냐 하딩은 곧 나타날 것이다. 짜잔, 이제 이 여자를 미워하면 돼, 하고 가만있어도 편히 제시될 것이다. 그때 온 마음으로 저항하여 그 여자를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적어도 이 영화가 마음 밑바닥에 침전해 있는 한, 쉽고 쉬운 증오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정세랑 소설가. <피프티 피플> <보건교사 안은영> 등 여섯권의 장편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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