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스> 케이스’에 담긴 사회운동의 딜레마와 과제
2018-09-26
글 : 손희정 (문화평론가) |
‘<카운터스> 케이스’에 담긴 사회운동의 딜레마와 과제

카운터스.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일본의 반인종주의, 반소수자 혐오 시민운동의 이름이다. 카운터스는 저항 시위를 조직함으로써 혐오세력의 기세를 한풀 꺾고 혐오표현금지법 제정을 이뤄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카운터스>(2017)는 그 투쟁 과정의 일부를 담은 작업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조기 종영됐다. 개봉 직후 주인공 다카하시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국내에 폭로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 이에 배급사가 신속하게 대응한 것이다.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피해자와 소통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작품과 관련된 행사를 취소하고 조기 종영을 선택한 배급사의 대처는 모범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로 공동체 상영이나 VOD 배급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 앞에서는 머리가 복잡해진다. 작품을 둘러싸고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혹은 어떤 윤리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작품의 완전한 말소와 폐기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일까? “작품+문제=폐기”라는 단순한 도식을 모든 작품에 일괄적으로 적용해도 괜찮은 걸까? 그보다는 다양한 변수들의 조합 속에서 경우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들 속에서 ‘<카운터스> 케이스’를 들여다보면, 고려할 만한 변수들이 보인다.



성폭력 가해자인 주인공 다카하시는 야쿠자 출신으로 보도방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험한 일”을 해온 자다. 스스로를 ‘우익’이자 ‘진짜 남자’라고 여기는 다카하시는 재특회의 시위를 구경하러 갔다가 분개한다. 그에게 있어 재특회의 약자에 대한 혐오,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진정한 우익, 진정한 남자라면 할 수 없는 비열한 짓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폭력으로 날려버리면 간단히 끝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경단 성격을 띤 비밀결사대 ‘오토코구미’(男子組織)를 결성하고 카운터스에 합류한다. 오토코구미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체포되어도 상관없으니 저 새끼 하나는 조지고 간다”는 마음으로 카운터스 집회에 참여한 다카하시와 오토코구미는 실제로 혐한 세력에 폭력을 행사했고 수차례 체포됐다. 오토코구미와 재특회의 무력 충돌을 본 시민들은 “그놈이 그놈”이라며 비판한다. 물론 변호사, 좌파 활동가, 교수, 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시민으로 이뤄진 카운터스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카운터스.” 다큐는 일견 이 딜레마에 대한 작품으로 보인다. 카메라는 애정의 거리와 불편의 거리 사이에서 줌인, 줌아웃하며 다카하시를 주시한다. 그러나 결국 “다카하시는 영웅이었다”고 결론내린다. 다큐의 정점에서 그의 폭력적인 남성성에 대해 “이것은 어째서 정의가 아니란 말인가?”라고 질문하는 전지적 내레이션이 흐르는 것이다. 그것도 좌파 여성 활동가의 목소리로. 애초에 다큐가 일본 학원 액션물의 문법과 속도를 따르는 것은 이런 결론을 예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큐는 주인공으로 ‘야쿠자 출신의 정의의 사도’ 다카하시를 낙점하고 장르영화적 형식을 따르면서 ‘남성영화’의 길을 갔다. 덕분에 카운터스 운동 자체가 다큐 안에서 과도하게 남성화되어버렸다. 카운터스의 얼굴은 남성의 얼굴로, 카운터스 운동의 성격은 마초적인 것으로 과잉대표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성의 얼굴은 지워지고, 내부에서 훨씬 더 치열하게 논의되었을 다양한 논쟁들은 사라졌다. 문제는 이런 ‘선택들’이 기실 이 사회가 남성의 폭력을 미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폭력을 둘러싼 맥락에 대한 사유를 지우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큐가 선택한 소통 혹은 흥행 전략으로서의 ‘대중성’이었을 터다.



하지만 어떤 관객은 다큐의 이런 전략 때문에 별수 없이 다카하시와 왜곡된 ‘정의로움’을 경유해 사회(진보)운동과 그에 대한 남성 중심적 기록이 가지고 있는 어떤 딜레마와 대면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스크린과 객석 사이에 균열이 등장한다. 그 비동의의 간극 속에서 관객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다큐가 전시하고 있는 ‘남성다움’이 정말로 정의인가?” 어떤 관객은 (가해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이미) 다카하시의 행동에서 불안을 감지하기도 했다. “저 사람이 카운터스 운동을 빌미로 다른 폭력을 저질렀으면 어쩌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알고 다큐멘터리를 본 관객이라면 “저렇게 ‘내가 상남자요’ 하는 사람이니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몰랐겠네”라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카운터스 내부의 남자들이 다카하시를 영웅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행동이 충분히 제어되지 않았을 것임을 예측하게 된다. 그 전반적인 상황이 ‘<카운터스> 케이스’의 전조였던 셈이다.



혐오세력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시민운동인 카운터스는 “소수자를 혐오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일본 사회에 던졌다. 그리고 법적인 제재 장치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감으로써 한 사회가 소수자 혐오와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한국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한 상상력이다.



하지만 카운터스는 다양한 정치적 의견과 태도,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반인종주의의 목표 아래 연대한 운동이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에는 ‘정치적인 올바름’이 카운터스의 운동 방식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상남자(라는 자아 이미지)”로 불의와 싸우는 이도 있었다. 이런 입장 차와 모순들 안에서 언제든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고 성폭력을 가하는 이중성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또 다른 어떤 소수자라도 운동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초 활동가, 그를 영웅으로 그려내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성폭력 가해 폭로 등으로 이어지는 ‘<카운터스> 케이스’는 사회(진보)운동의 딜레마와 과제를 보여준다. 그 자체로 치열한 사유와 논쟁, 그리고 공동체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운터스>를 경유해 논의의 장을 펼칠 수는 없을까? 작품을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이 이야기해서 문제화하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공동체가 피해자에게 사회적으로 사죄하고 폭력을 허락하는 구조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말이다(다카하시는 올해 지병으로 사망했고, 이제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할 기회도 없는 셈이다).



또다시 “그 정도 일로 이 작품이 묻히는 것은 아깝다”는 식의 말이 들린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도 우리는 말소가 아닌 더 많은 논쟁을 해야 할 것 같다. 어떤 것은 사라져버림으로써, 더 부풀려진 신화 속에서 더 큰 영웅이 되기 마련이다. 그것이야말로 제일 나쁜 경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