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항상 이야기에 목마르다. 영화계는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기 항상 어렵다고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질 좋은 원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원석을 갈고닦을 시간과 투입되어야 할 공력, 그리고 이를 적절히 다룰 요령이 부족할 따름이다. 이에 경기콘텐츠진흥원과 한국영화감독조합은 다양성영화 시나리오 개발지원사업을 진행, ‘G-시네마 시나리오’라는 명칭으로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의 발굴과 개발에 힘쓰고 있다. 2018년 시작된 이번 시나리오 개발지원사업은 2018년 5월 수많은 응모작 중 최종적으로 15편을 선정한 뒤 3개월간의 기획개발지원에 들어갔다.
G-시네마 시나리오 사업의 특징은 단순히 공모작을 뽑는 데 그치지 않고 멘토 시스템을 통해 시나리오의 개발에 주력한다는 점에 있다. 영화산업계 키 플레이어와 의사결정자를 멘토로 선정하여 멘토 과정의 신뢰도를 높이고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이다. 윤제균, 임필성, 양익준, 신연식, 권형진, 이경미, 노덕 7인의 감독으로 구성된 멘토들은 각각 2~3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멘티들과 함께 시나리오 개발에 착수해왔다. 그리고 지난 9월 19일 수요일 오후 2시 청년문화공간 JU 동교동 다리소극장에서 ‘G-시네마 시나리오 쇼케이스’가 열렸다. 15인의 본선 진출작들을 모아놓고 발표를 진행한 이번 행사에서는 대상 1편과 최우수상 1편, 우수상 3편으로 최종 5편의 시나리오를 선정하며 그간의 성과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발표에 앞서 15인의 본선 진출작 작가들이 그간 자신이 준비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쇼케이스가 진행됐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의 오창희 원장,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윤제균, 민규동 공동대표를 비롯해 50여명의 영화산업 관계자들이 작가들의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함께했다. 작품당 대략 5분 정도의 발표와 5분간의 질의응답으로 이뤄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들 이야기가 지닌 가능성과 매력을 엿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3개월간 시나리오를 함께 만지고 다듬어온 멘토와 멘티들은 지난 시간의 지난한 노력과 소중한 조언에 대해서 서로 감사의 인사를 나누며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공감대와 끈끈한 동료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번 쇼케이스를 통해 이야기가 태어나는 과정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이야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두번의 파트로 나눠서 진행된 이번 쇼케이스에서 첫 번째 발표를 맡은 건 강경태 작가의 <1번 국도>였다. 오래전에 끊긴 1번 국도를 따라 낯선 세 사람이 길을 떠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세상을 등진 들짐승 같은 사내와 세상을 버린 악다구니 소녀, 그리고 세상만사 유쾌한 아저씨 등 캐릭터들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이야기였다. 멘토를 맡은 양익준 감독 역시 캐릭터들의 힘이 살아 있는 이야기였다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번째 주자는 강경화 작가의 <출장>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출장길에 오른 남자와 그와 우연치 않게 동행한 동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상실감과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상처를 제대로 응시한 후에야 보이는 진짜 힐링의 의미를 짚어낸 주제의식으로 권형진 멘토의 칭찬을 이끌어냈다. 이후로도 15명의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냈다. 한편의 연극처럼 꾸며온 작가도 있었고, 영화 예고편처럼 영상을 준비해 온 작가도 있었다. 시나리오만큼 다채롭고 재미있는 발표 형식에 짧지 않았던 쇼케이스의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윽고 작품 발표가 모두 끝나고 수상 결과가 발표되었다. 수상 결과 발표에 앞서 오창희 경기콘텐츠진흥원장은 “한국영화감독조합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사업 구상 초기부터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모든 작품들이 좋았고 그래서 격려하고 싶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 죄송할 따름이다. 내년에는 더 큰 예산을 확보해서 한층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이후 시나리오 쇼케이스 수료증 전달이 진행됐다. 멘토와 멘티들이 서로 마주보며 그간의 노고와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는데 3개월간의 추억과 기록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 쑥스러워하면서도 연신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를 나눴다.
우수상은 <탭>의 김지영 작가(멘토 노덕 감독), <걸리버 연애기>의 서하은 작가(멘토 양익준 감독), <아주 사소한 고백>의 이유빈 작가(멘토 임필성 감독)에게 돌아갔다. 김지영 작가는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노덕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기대해달라”며 기쁨을 한껏 표시했다. 서하은 작가는 “발표가 너무 엉망이었는데 발표는 점수에 반영이 안 돼서 다행이다”라며 웃음을 전달한 뒤 양익준 멘토에 대한 고마움을 밝혔다. “사실 한달도 남지 않았을 때 양익준 감독님이 전면적으로 뒤집으라고 하셔서 용기가 안 났다. 하루 15시간씩 작업했고 결국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주 사소한 고백>의 이유빈 작가는 “처음엔 시나리오와 맞지 않는 멘토가 아닌가 싶어 고민했다. 하지만 진행하다보니 오히려 그 점이 다행이었다. 자유로운 성격과 조언으로 나의 보수성을 깨주신 임필성 감독님께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마무리했다. 우수상에겐 각 5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2천만원의 상금이 주어지는 최우수상은 <재판>의 이주헌 작가(멘토 권형진 감독)에게 돌아갔다. <재판>은 본선 심사 과정에서도 빼어난 완성도로 멘토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이다. 이주헌 작가는 “<재판>이라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거름을 잔뜩 주신 권형진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게 해주셔서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로 알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3천만원의 상금과 대상의 영광을 차지한 주인공은 <위대한 그녀>의 김준 작가(멘토 윤제균 감독)였다. 김준 작가는 “<뚱쓰>(가제)가 <위대한 그녀>가 되기까지 윤제균 감독님께 받은 게 너무 많다. 함께 윤제균 감독님의 멘티였던 <피로인>의 홍수영 작가, <서울의 공포>의 김현진 작가도 큰 힘이 되었다”며 벅찬 마음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로써 3개월간의 시나리오 개발은 끝이 났지만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발굴하고 키우는 작업은 계속된다. 이들 시나리오는 올해 부산국제영화a제 기간 중 진행되는 ‘LinK of Cine-AsiA(아시아영화포럼&비즈니스쇼케이스)’에서 시나리오 피칭을 진행하고 비즈매칭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젠 그만 포기하라는 말을 계속 들었지만 시나리오를 향한 꿈을 멈출 수는 없었다”는 김준 작가의 말처럼 좋은 이야기 한편을 쓰는 건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들 덕분에 한국영화 시나리오는 한층 두텁고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경기콘텐츠진흥원처럼 기관이 육성에 힘을 보태고 싹을 틔울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작가들의 열정과 영화인들의 관심이 있는 한 이야기의 샘이 마를 일은 없을 것이다.
수상작 5편
<위대한 그녀> 김준 작가
백수 신애(26.여). 취업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찾지 못하는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자신이 ‘먹기’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푸드 파이터 대회에 나가 디팬딩챔피언 고바야시와 겨루기로 결심한다.
멘토 윤제균 감독_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컨셉 자체가 재미있다. 충분히 제작을 해 볼 수 있는 아이템이고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JK필름에서 제작할 의향이 있다. 얼른 만들고 싶을 따름이다.”
<재판> 이주헌 작가
“내 안의 악령이 사람을 죽였다”라고 주장하는 살인범과 반드시 그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변호사. 인간의 이중성인가? 빙의된 악령의 살인인가? 진실과 심령의 경계에서 공포의 재판이 벌어진다.
멘토 권형진 감독_ “너무 잘 다듬어진 이야기라 솔직히 별로 도움 줄 게 없었다. 뭔가를 더하기보다는 덜어내자는 쪽으로 조언했다. 법정 공포라는 컨셉 자체가 무척 신선하다. 게다가 아주 쫀쫀하게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나 스스로가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관객에게도 얼른 보여주고 싶다.”
<탭> 김지영 작가
남은 거라고는 관절염과 빚뿐인 왕년의 탭댄스 황제 일갑. 오로지 돈 때문에 자신의 무대를 망친 장애인센터의 수업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재적인 리듬감을 가진 소년 진호를 만나게 되는데. 꼰대 탭댄서와 바른 말만 하는 10살 진호는 원하는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을까.
멘토 노덕 감독_ “김지영 작가의 남편이 탭댄서다. 그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탭댄스라는 게 실제로 보면 거기서 오는 아드레날린이 있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애인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이다. 건강한 정서를 제대로 된 휴먼 드라마로 풀어낸 신나는 이야기다.”
<걸리버 연애기> 서하은 작가
3m라는 큰 키 때문에 세상에 갇히고도 밝고 순수하기만 한 여자와 아버지에 대한 애증에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무뚝뚝한 남자가 우연히 만나 사랑으로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 밖으로 함께 걸어나가는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멘토 양익준 감독_ “<옥자>를 모티브로 삼아서 조언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 소재다. 은둔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주인공과 가족들 사이의 드라마가 따뜻하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만들어질 법한 안전한 시나리오보다 자유분방하고 도전적인 상상을 응원했다. 이 상상이 영상으로 옮겨졌을 때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아주 사소한 고백> 이유빈 작가
이혼 후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 도영과 고향 거제로 돌아온 정연은 어머니 인화의 집에 기거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불의의 화재로 아들을 잃게 되면서 삶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던 중 자신이 구출된 과정을 듣게 되는 정연. 손자를 딸의 짐으로 여기던 인화가 도영을 일부러 구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는데….
멘토 임필성 감독_ (일정상 자리를 비운 임필성 감독 대신 노덕 감독이 평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출발해서 심도 있게 파고든다.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다. 이렇게 전형적이지 않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는 오랜만에 접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