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 VR>의 채수응 감독은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이하 베니스영화제)에 한국 감독으로는 유일하게 진출해 가상현실(VR) 경쟁부문에서 ‘최고 VR 경험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무려 20여년 전인 17살 무렵, <씨네21>과 인터뷰한 경험(1998년 <씨네21> 174호 특집 ‘영화를 만드는 아이들’ 기사에 1회 청소년영상페스티벌 수상자로 소개되었다)이 있다.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만들겠다”던 ‘영화 꿈나무’는 어느덧 성장하여 미래 기술 VR을 개척하고 있다. 현재 VR과 영화의 접목 가능성을 최전방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를 만나 <버디 VR>을 연출하게 된 사연과 앞으로의 비전을 함께 들어봤다(그가 미국에서 경험했던 시각특수효과(VFX) 분야에 관한 이야기는 <씨네21> 1100호 특집 ‘국내 최고 VFX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미래의 시각효과기술’ 기사에서도 볼 수 있다).
-<버디 VR>이 올해 베니스영화제 VR 경쟁부문에서 ‘최고 VR 경험상’을 수상했다. 먼저 수상 부문을 ‘최고 VR상’(Best VR), ‘최고 VR 경험상’(Best VR Experience), ‘최고 VR 스토리상’(Best VR Story)으로 나눈 점이 흥미로웠다. 즉, 수상 부문의 구분법에서부터 영화제가 VR의 어떤 특징을 주목하는지가 드러났다.
=원래는 ‘경험상’이 아니라 ‘인터랙티브(상호작용성)상’으로 표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출품된 40여편 중에서 360도 영상 기반의 작품보다 리얼타임 기반의(상호작용 요소가 들어간) 작품이 전반적으로 평가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상호작용성을 기본 전제로 한 상태에서 각 부문을 평가하느라 명칭을 바꾼 것 같다. 심지어 스토리상을 수상한 벤자민 누엘 감독의 <죽은 자들의 섬>조차도 실사 기반이 아니라 리얼타임 엔진 기반으로 관객의 자유도를 허용한 작품이었다. 결국 명칭까지 바꿀 정도로 상호작용성이란 특징을 중요하게 평가했다는 뜻이다.
-<버디 VR>은 어떤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작품인가.
=<넛잡: 땅콩 도둑들>(2014)의 제작사 레드로버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한 ‘2017 가상현실콘텐츠제작 지원사업’ 과제로 <버디 VR>을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내가 연출을 맡기로 하면서 게임의 요소가 다소 부각되던 초기 컨셉을 뒤집고 지금처럼 캐릭터와의 교감을 중요시하는 인터랙티브 기반 작품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장편영화를 오래 작업했기 때문에 평소 VR에 대해 고민하던 지점을 자연스럽게 영화와 접목하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작품의 전체 러닝타임이 15분 내외다. 제작비는 얼마나 투입됐나.
=인터랙티브영화의 묘미라면 엔딩이나 플롯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그러려면 20억원 규모로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지원사업 예산을 포함하더라도 최고 8억원 정도의 규모로 완성해야 했다. <넛잡…>의 주인공 설리의 친구 버디를 등장시켜 캐릭터 중심으로 플롯을 전개하니 제작비 문제가 해결됐다. 공간을 최소화할 수 있고, 말이 거의 없는 캐릭터라서 더빙과 같은 언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 언어와 성별과 나이를 뛰어넘는 캐릭터를 다뤄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해외 관객이 더욱 작품에 공감할 수 있었다.
-관객이 버디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버디 VR>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인가.
=외로움을 느끼는 버디를 달래주는 과정을 통해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한 다음, 관객이 1인칭 시점에 놓일 수 있도록 스토리를 짰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일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듯, 제4의 벽 뒤에 있던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인터랙티브 요소는 중대한 상황일 때 써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보상 체계와 영화 관람의 차이다. 게임은 미션을 반드시 수행하지 않으면 진행이 안 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감정이입할 시간과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기존의 영화에서 참고한 부분도 있나.
=테마파크의 공간 스토리텔링과 범인이 누구인지를 직접 참여해서 추리하는 인터랙티브 연극 <쉬어 매드니스> 같은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입부에서부터 관객이 일종의 제한적 자유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자, 는 것이 설계 목적이었다. 대신 관객은 작품을 망치지 않는 설계자의 손바닥 안에 있어야 한다. 컨트롤러를 가지고 어떤 오브제를 건드려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습득 과정은 관찰자가 분석가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게임의 언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종의 방탈출 게임에서 그 방을 분석하는 시간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제작사 레드로버와 협업한 리얼타임 VFX 스튜디오 에이펀 인터랙티브의 유한 미술감독과 <넛잡…>의 톤 앤드 매너를 유지하는 방향을 고민하면서 존 굿맨이 요정 같은 캐릭터들과 집을 사수하기 위해 벌이는 <바로워즈>(1997) 같은 영화도 참고했다.
-관객이 도중에 1인칭 시점에 놓이도록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부여해준 이유는 뭔가.
=VR의 연출 가운데 스케일 연출은 흥미로운 도구다. 작품 속으로 들어간 관객의 스케일이 달라지면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다음 컨트롤러를 이용해서 직접 음악을 연주하게 한다든지, 공을 던져서 숨바꼭질을 유도한다든지, 여러 시시콜콜한 행동이 시간을 흐르게 만들고 버디와 친해지게 만든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만드는 걸 목표로 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한 여러 VR영화를 접했을 텐데, VR을 대하는 세계 영화인의 태도나 주요 관심사는 무엇이었나.
=영화제가 내세운 키워드가 시간, 공간, 존재였다. 미셸 레일핵 프로그래머도 “우리가 그동안 영화를 통해서 시간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VR은 공간을 조작할 수 있는 매체다”라고 하더라. <버디 VR>을 만들면서 가장 고민했던 키워드이기도 하다. <버디 VR>의 수상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지만 단순하고 어쩌면 유아적이기까지도 한 이 작품에서 VR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을 주목해준 것 같다. 인종, 인권, 환경 문제 등의 깊고 넓은 주제를 다루는 작품도 중요하지만 영화와의 접목에 있어서 소재를 어렵게만 보지 않는 시각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 누구는 기존의 IP를 활용해 VR 콘텐츠를 만드는 방안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 길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360도 영상을 넘어 형식적으로 VR의 문법이 끝도 없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다음 프로젝트 역시 VR영화를 고민 중인가.
=우선 관객의 행동패턴을 분석할 수 있는 뇌파(brainwave)와 머신러닝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VR영화를 개발하고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초청된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 제작자로도 참여했는데 이때 알게 된 탈북과 새터민 관련 이슈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 액션 스릴러 영화도 기획하고 있다. 웹과 모바일 스크린을 목표로 준비 중인데 VR의 태생이 인터넷인 만큼, 지금 시대에 너무 극장 스크린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서서 장편영화와 VR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