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몰리스 게임>엔 왜 질탕한 놀이판이 깔려 있지 않은가
2018-10-04
글 : 홍은미 (영화평론가)

<몰리스 게임>의 리듬은 이상하게 둔하다. 영화의 단선적인 구조가 지나치게 뻣뻣해 에런 소킨의 결연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이런 구성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연출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감안해봐도 인상이 크게 바뀌진 않는다. 질주해 나가는 서사엔 소킨의 인장이 여기저기 찍혀 있건만 전체 구조로 보자면 민첩하기보다는 강직해서 영화가 외려 평평해 보인다. 각종 업계의 생태와 시스템의 속성을 속사포 같은 대사로 탁월하게 묘사해내는 그의 재능은 몰리 블룸(제시카 채스테인)의 포커판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지만, 소킨은 질주하던 영화를 계속해서 불러세워 몰리의 윤리적인 면모를 웅변하듯 변론한다. 그러니 이상하다.

<몰리스 게임>의 일차적인 유희는 몰리가 전문가다운 솜씨로 포커판을 장악해가는 과정을 빠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건 연출작으로도 다시 한번 입증해내는 소킨의 기술전일 뿐, 스스로는 그것에 사활을 걸진 않는 것 같다. 카드가 도대체 몇장인지 도박장의 생태는 어떠한지 몰랐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다시 덧붙일 필요 없는 대가의 비범함이 이 작품에만 속한 건 아니다. 말하자면 소킨이 각본가로 참여했던 <소셜 네트워크>(2010), <스티브 잡스>(2015)의 시스템의 속도전이나, <머니볼>(2011)에서 야구 경기의 생태전이 안겼던 비슷한 쾌감을 소킨은 이 영화에서 또한 선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영화적 쾌감을 동력 삼아 기어코 닿고자 하는 곳을 향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대목은 소킨이 인물들의 선택의 문제에 유독 민감하며 결국 그 선택이 윤리적인 면모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소킨은 몰리 블룸이라는 포커판의 여제를 두고 윤리적인 선택의 문제를 아예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영화는 몰리의 전사와 현재의 사건을 주기적으로 교차시킨다. 현재 몰리는 불법도박장 운영 혐의로 기소되었고, 검찰은 마피아 조직을 잡아들이기 위해 몰리에게 고객 정보를 넘기도록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사실 영화가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검찰뿐 아니라 출판사, 영화사, 심지어 그녀의 변호사에게까지 몰리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밀을 노출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그것도 전 생애를 거는 결단인 것처럼, 이 선택이 아니면 부서질 수도 있을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버틴다. 그러니 소킨이 이 영화에서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쪽은 그간 펼쳐왔던 ‘선택의 속도전’이 아니라 통제된 질서에 자신의 규율로 맞서는 저돌적인 한 인간의 선택,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피 흘릴 각오를 하며 존재의 온 힘을 실어 버티는 선택과 그 근간을 이루는 ‘육중한 신념’ 말이다.

나아가 영화가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몰리의 육중한 신념이 사회질서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혹은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과 극적으로 온화하게 조우하는 순간이다. 그러니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몰리스 게임>은 영화 자체의 활력으로만 가동되기보다 개인의 신념이 정의와 만나는 지점을 에런 소킨이 여전히 강고하게 믿고 의지하며 집요하게 지향해 나가기에 동력을 획득한다고. 그 지향의 계보 안엔 오래전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가 있었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일부 영화들이 있다. 무리가 될지라도 거대한 이름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들의 신화가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강인한 여성을 통해 다시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마도 실존 인물인 몰리 블룸의 강인함에 소킨이 먼저 감화되었기에 이야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달리 말하면 <몰리스 게임>은 개인의 신념이 철저히 지켜지되 미국이란 거대 국가의 이상향적 가치에 영화적 유희를 만끽하며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설명되는 인물

그런데 나는 영화적 유희가 기어코 닿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계속해서 소진되어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에선 이상하게도 엄청난 속도감은 느껴지는데 자유로운 활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몰리의 (자서전 내용과 유사할) 내레이션과 함께 그녀의 전사는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질주해 나간다. 유년기부터 챔피언이 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엄격하게 교육받은 몰리는 경쟁자가 누가 되었든 반드시 그 대상을 넘어서야 한다. 모굴 스키선수 시절에는 육체적 한계를 정신력으로 넘어서야 하며 포커 게임을 주재한 땐 하우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제해야 한다. 아니 그 스스로가 하우스의 질서가 되어야 한다. 몰리는 포커 게임의 심리전에선 방관자이지만, 게임이 진행되는 하우스의 시스템을 통제하며 그곳을 장악한다. 반면 자신의 선에서만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에 직면할 때마다 몰리는 실패의 쓴맛을 볼 수밖에 없다. 작디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낙상하며 선수 생활은 끝이 나고, 포커 게임의 멤버를 통제하지 못해 하우스를 잃는다. 그런 실패의 순간이나 실패의 전조가 보일 때마다 영화는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동시에 숏의 전개 속도까지 현저히 늦춘다.

그러니깐 영화는 몰리의 인생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내달리며 제어할 수 없는 극점을 맞을 때마다, 현재 기소된 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숨을 고르며 그녀의 윤리적인 면모와 강직한 원칙을 강조하며 항변에 가까운 변호를 시작하는 것이다. 몰리의 승리감이 감도는 화려한 전력과 능수능란한 전술들, 무엇보다 가십과 자서전을 통해 노출된 그녀의 역사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들려주고, 실로 널리 알려지지 못한 그녀의 진정 강인한 면모를 영화가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어느 시점에서나 몰리는 설명된다. 이 사실이 영화를 결정적으로 더 둔탁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에런 소킨의 인물들은 언제나 다변가이긴 했지만 명확한 설명을 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신념을 계속 주지시키긴 했지만 근거를 설명하려 들진 않았다. 그들의 인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감지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언제나 기꺼이 매혹되었다. 그런데 몰리 블룸은 아니다. 그녀는 무수히 중첩된 대구의 형식 안에서 계속해서 강인한 여성으로 설명되고 각인된다. 척추가 부서지고 엄청난 속도로 공중을 날아 곤두박질쳐도 꿋꿋이 다시 일어서는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인물로, 아버지의 질서가 지배하는 홈을 뛰쳐나와 자신의 질서를 하우스에 세우는 개척자로, 무엇보다 윤리적인 신념으로 우뚝 서는 시민으로. 물론 영화는 실화를 근거로 했기에 과도한 환상이 깃들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에런 소킨이 지금 너무 근심한 나머지 능란한 기술을 동원해 어떤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 같다. 불안하고, 분노케 하는 정권을 향해 진짜 반듯하고 윤리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제시하며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단단한 전술을 충분히 존중하고 싶긴 하지만, 그보다는 에런 소킨이 옜다, 깔아주던 놀이판에서 질탕한 말들과 한바탕 놀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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