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베넷 밀러 / 출연 채닝 테이텀, 스티븐 카렐, 마크 러팔로 / 제작연도 2014년
만나온 영화들이 있다. 어디서 만나게 되었는지,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저마다 사연은 다르다. 어떤 영화는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 같아서 좋았고, 어떤 영화는 방향을 일러주는 좌표 같아서 좋았다. 물론 싫어했다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했다 싫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와 나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는 아니니까.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1976)는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내 인생의 영화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직접 통화하기엔 껄끄러운 상대다. 20대 초반에 이 영화에 열광했었고, 여기에 엉겨붙은 기억이 일상의 수위 너머로 범람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만남은 마땅히 문자 메시지 정도가 편하다.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는 언젠가 이런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해준 내 인생의 영화다. 안 지는 3년8개월 정도 됐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을 극복하고, 자주 만나고 싶은 상대다.
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면 세간의 평가와 상관없이 대부분 챙겨보는 편이다.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완성하기 어려운 독특한 인물과 묘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폭스캐처>의 주요 인물인 존 듀폰은 자신을 존경받는 저자이자 탐험가, 자선가, 우취인, 조류학자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우취인’은 ‘우표수집인’과 같은 뜻이나 존 듀폰은 ‘우취인’만 사용하길 고집한다). 창작이 무에서 유를 낳는 것이라는 비장한 말 속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하나 이런 영화들이 딛고 있는 지상의 구체성과 단단함이 주는 안정감은 위로가 된다. <폭스캐처>는 위로를 넘어 질투를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선 매우 특수하고 개별적인 실화가 부나 국가에 대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통로로 확장된다. 넓은 만큼 깊기도 하다. 질투를 느끼는 인물들의 심리를 다루는 면밀함은 서늘하게 감정을 파고든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 존 듀폰이 마구간에 갇힌 말들을 풀어주며 자유로이 떠나라는 듯 손짓하는 장면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인 그에게 연민마저 느끼게 한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밥 딜런의 <All the Tired Horses>란 노래가 떠오른다). 그리고 슐츠 형제의 레슬링 훈련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두 인물의 움직임은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을 몸짓만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무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넷 밀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한 상점에서 그에게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라며, 영화로 만들고 싶을 것이라며 봉투를 하나 주었다는 것이다. 열어보니 존 듀폰과 슐츠 형제에 대해 스크랩된 기사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은 질투심이 생긴다면 ‘질투’를 아예 주제로 삼아 탐구하거나, 별안간 모르는 사람이 봉투를 내밀지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신동석 영화감독, 단편 <물결이 일다>(2005), <가희와 BH>(2006)를 만들었으며 첫 장편 <살아남은 아이>(2017)가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