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대표 연기파 배우, 김윤석이 <암수살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를 상대하는 집요한 형사 김형민을 연기했다.
김윤석은 <암수살인>의 김형민을 비롯해 <추격자>의 전직 형사 엄중호까지 포함하면 무려 다섯 번이나 형사 캐릭터를 연기했다. 또 그는 주로 어둡고 센 성격의 역할을 많이 맡았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와 <황해>가 대표적이다. 그런 까닭에 김윤석을 떠올리면 심각하고 진지한 이미지가 먼저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는 여러 장르의 작품에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어마무시하게 센 타짜부터 찌질한 형사 혹은 멜로영화의 아련함을 보여준 중년 남자까지. 그가 연기한 다채로운 모습의 캐릭터들을 모아봤다.
능글맞지만 무서운, <타짜> 아귀 역
<범죄의 재구성>의 이형사 또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류덕환) 아버지 김윤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많은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작품은 최동훈 감독의 <타짜>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향연을 보여준 <타짜>에서 김윤석은 능글맞은 악역 아귀를 연기했다. 무서운 눈초리로 속임수를 솎아내며 여러 타짜들의 손, 귀를 잘라낸 그. 이에 걸맞게 아귀는 늘 자신만만한 태도로 여유로운 미소를 보여준다. 동시에 순식간에 돌변, 살벌한 말과 행동 서슴지 않는 그는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충청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김윤석이 구사하는 매끄러운 전라도 사투리도 인상적이다.
강렬한 내면연기, <추격자> 엄중호 역
김윤석의 어둡고 강한 이미지를 대중의 머릿속에 확고하게 만들어준 영화 <추격자>. 김윤석은 살인마 지영민(하정우)에게 감금당한 미진(서영희)을 찾아 헤매는 전직 형사이자 포주 엄중호를 연기했다. 그는 처음에는 속물적인 성격을 보여주지만 여러 상황을 겪으며 점점 변하는 인물이다. 미진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혼자 남은 미진의 딸 은지(김유정)와 동행하게 되면서 내면의 자책감은 그를 괴롭힌다. 돈이 목적이었던 초반부와 달리 극 중반부터의 엄중호는 자괴에서 비롯된 이타심으로 미진을 찾는다. 타인의 감정 따위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지영민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인 셈.
세상 찌질한 형사, <거북이 달린다> 조필성 역
<추격자>로 2008년 극장가를 접수한 김윤석은 곧바로 <거북이 달린다>로 전직 형사가 아닌 현직 형사 역을 맡았다. <거북이 달린다>에서 그가 맡은 조필성은 세상 찌질한 형사다. 다섯 살 연상의 아내(견미리) 앞에서는 기 한번 못 펴는 그는 아내의 돈으로 도박을 하고 큰돈을 번다. 그러나 탈옥수(정경호)에게 얻어맞고 기절하고 돈도 뺏기고 만다. 형사의 카리스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돈을 잃었다는 것을 아내에게 들키고 구박 받으며 속옷 차림으로 쫓겨난 그의 모습은 짠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냈다. 김윤석은 <추격자>와의 엄중호와는 전혀 다른 설정, 성격으로 다채로운 연기 폭을 증명했다.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 <남쪽으로 튀어> 최해갑 역
<남쪽으로 튀어>에서 김윤석이 연기한 최해갑은 내키지 않는 것은 결코 하지 않는 고집 센 인물이다. 그는 남들의 눈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가지지 말고, 배우지 말자”라는 신념을 꿋꿋이 주장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고집불통 아저씨로 보이는 해갑이지만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그는 오히려 흔히 말하는 ‘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독특한 성격 뽐낸 그는 코믹한 영화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행복이란 무엇인가’란 영화의 질문을 훈훈하게 전달했다.
광기와 집착을 삼킨 살인자,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석태 역
<황해>에서 소뼈로 사람들을 거침없이 때려죽이던 김윤석은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에서도 살인자를 연기했다. <화이>에서 그가 연기한 석태는 살인자와 아버지를 결합한 캐릭터다. 그렇다고 <화이>에서 가족애, 부성애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화이(여진구)를 향한 그릇된 석태의 사랑에 눈물 자아내는 놀라운 반전 따위는 없다. 석태는 단순히 화이가 자신과 같은 강한 살인자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인물이다. 화이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소리치는 석태의 모습은 피 묻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황해> 이후 <완득이>, <남쪽으로 튀어> 등을 통해 다소 코믹한 캐릭터를 연달아 맡아온 김윤석은 <화이>로 오랜만에 어둡고 잔혹한 역할로 복귀해 진면목을 보여줬다.
아련함 장착한 눈빛, <쎄시봉> 오근태 역
사랑에 대한 아련함을 장착한 김윤석의 캐릭터도 있다. <도둑들>의 마카오 박은 <타짜>의 아귀에 로맨스를 더한 캐릭터였다. <쎄시봉>의 오근태는 더 로맨스에 가까운 캐릭터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그렸다. <쎄시봉>은 청년 시절의 오근태(정우)와 민자영(한효주)의 연애를 중심으로 한 영화지만, 후반부를 장식한 중년의 오근태(김윤석)와 민자영(김희애)의 만남은 첫사랑이라는 추억의 아련함을 극대화했다. 중년의 오근태는 자영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던 청년 근태와 180도 달리진 시니컬한 태도로 변했다. 그는 정말 변한 걸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애써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자영을 떠나보낸 뒤, 혼자 흐느끼는 그의 모습은 짙은 여운을 남겼다.
불꽃 튀는 연기력 대결, <남한산성> 김상헌 역
서로 다른 가치관의 인물들이 펼치는 설전을 중심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 김윤석은 그간 쌓아온 연기 내공을 마음껏 보여줬다. 그가 맡은 예조판서 김상헌은 타협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오랑캐들에게 굴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대립한다. <남한산성>에는 화려한 액션의 전투신이 종종 등장했지만 두 사람의 얼굴만이 교차되며 설전을 펼치는 장면이 더 치열한 전쟁으로 보였다. <남한산성>은 촘촘한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력만으로 강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신념으로 가득 찬 악인, <1987> 박처장 역
<황해>, <화이>, <전우치> 등 많은 영화에서 악인을 연기한 김윤석이지만, 가장 돋보였던 캐릭터를 꼽자면 <1987>의 박처장을 꼽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간 그가 연기한 악인들의 행동은 돈, 사랑 등 모두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1987>의 박처장은 그렇지 않다. 그는 국가를 위해 빨갱이를 처단한다는 ‘거룩한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죄 없는 이를 죽이고 이를 은폐하는 등의 잘못을 저지르지만 강한 신념에 사로잡힌 그에게 망설임이란 없다. 결국 진실이 탄로나 감옥에 가서도 죄를 시인하지 못하는 박처장. 그의 오만한 태도에는 연민이 들 정도다. 김윤석이 연기한 박처장은 잘못된 신념을 가진 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준 캐릭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