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호주의 여성감독 안나 브로이스키가 2013년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소개된 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원제인 ‘Aim High in Creation!’은 김정일의 저서 <영화와 연출>의 단원 제목 ‘창작에서는 크게 노리는 것이 있어야 한다!’에서 따온 것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안나 브로이스키 감독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주한 호주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이란 등에서 자랐으며,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진귀한 영화다. 좀처럼 보기 힘든 북한 사회와 북한영화를 보여준다. 또한 북한의 체제선전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폭로하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비판이 담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 사회에 악마처럼 알려져 있는 북한 사회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그 결과 북한 체제의 문제점과 북한을 악마화하는 미국 중심 체제의 문제점이 동시에 비판된다. 요컨대 영화는 북한 사회를 열린 눈으로 바라보며 다층적인 비판을 수행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목적은 비판에 있지 않다. 영화는 환경을 파괴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짓밟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인류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세계시민으로서 국경을 초월한 반자본주의적 저항에 나설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북한으로 떠난 영화 유학
안나는 자신을 버니 샌더스와 같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는 감독이지만, 대개의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한 선입견이 많았다고 말한다. 서구 영화인 최초로 북한의 영화산업 전반을 촬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을 때 안나는 북한이 자신을 체제선전에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객은 똑똑하기 때문에 그대로 찍으면 알아서 볼 것”이라 생각하고 촬영에 돌입했다고 한다.
영화는 호주의 탄층가스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시드니파크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탄층가스와 셰일가스는 지층 내에 광범위하게 스며 있는 천연가스로, 채굴방법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사회 갈등을 낳고 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프라미스드 랜드>(2012)를 보면 셰일가스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거짓공작을 펴는 자본의 사악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안나는 탄층가스개발을 막기 위해 북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는 북한이 미국과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나라로 최고의 선전영화를 만들어왔으며, 영화광인 김정일에 의해 이미지와 스펙터클로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온 안나는 영화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조선예술영화 촬영소 등을 안내받는다. 영화는 안나가 21일간 머물면서, 영화인들을 만나고 체제선전 투어를 다니는 장면들을 담는다. 외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북한인들이 김일성, 김정은 부자를 우상화하는 모습은 뜨악하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괴상한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나라이지만, 위성도 있고 핵무기도 있어서 어느 나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말하는 원로감독 박정주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여기도 기후 문제를 걱정하느냐?”는 안나의 질문에 “여기를 뭐 달나라로 아느냐?”라는 그의 대답은 소탈하다. 북한은 다 굶주리는 줄 알았다는 안나의 말에 안내원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더니, “반드시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는 뼈 있는 대답을 들려주는 장면은 흥미롭다.
악의적인 풍자가 아닌 연대감
안나는 북한 사람들에게 예의와 연대를 표하며 북한의 선전내용을 그대로 담는다. 이 과정에서 북한 체제와 선동예술에 대한 풍자가 블랙코미디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안나가 북한 사람들을 교묘히 속이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만들겠다는 안나의 순수한 열정을 보고 북한 사람들이 격의 없이 대하고, 안나 역시 열린 마음으로 북한 영화인들을 대한 결과다.
안나의 관심사는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괴상한 나라인가에 있지 않다. 호주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적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람들은 안나를 자본주의에 대항해 지역을 지키겠다는 한 사람의 영화인으로 대한다. 안나 역시 북한영화를 유치한 선전영화로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특화된 장르이자 효과적인 무기로 존중한다. 이러한 안나의 생각은 호주 배우가 북한영화들은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고 꼬집자 “코카콜라 광고도 똑같은 패턴의 반복”이라고 응수하는 대목이나, “선전선동에서 우리는 늘 피해자”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을 통해 잘 드러난다. 즉 서구 사회도 자본주의적 선전선동이 난무하고 있기에, 북한식 선전선동이 특별히 나쁘다고 보지 않는 입장이다. 안나는 섬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침략자를 몰아내는 북한영화를 보면서, 다국적기업의 환경파괴에 맞서 자신의 섬 호주를 지켜야 하는 자신의 위치를 떠올린다. 다만 안나는 북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적은 미국이 아니라 기업(자본)임을 분명히 짚는다.
영화의 말미에 안나가 만든 단편영화 <정원사>가 담겨 있다. 영화에서 북한인들에게 보여준 15분짜리 풀버전에 비해 짧은 11분짜리 편집본이다. <샤인>(1996), <스탠바이, 웬디>(2017) 등을 촬영했던 제프리 심슨 촬영감독이 참여한 단편영화는 나름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지닌다. 공원의 정원사가 탄층가스개발을 강행하려는 대기업의 기만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으로, 자연을 빗댄 은유, 신념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여주인공, 자본주의자 악당, 격투, 다 같이 노래 부르기 등 안나가 분석한 북한영화의 요소가 오마주처럼 들어 있다.
영화는 호주의 탄층가스개발을 막지 못했지만, 시드니에서 만은 막을 수 있었다는 안나의 후기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강한 적을 물리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민중의 힘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다는 것은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이자 ‘우리의 무기’라고 말하는 안나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감동적이다. 바로 그러한 믿음과 의지를 가지고 북한에 갔기 때문에 추방당하지 않고 북한 영화인들과 인간적인 교감과 동지적 연대의식을 나눌 수 있었으리라.
완성된 다큐멘터리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를 본 북한의 반응은 어땠을까. 안나의 전언에 의하면 “북한 관객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북한의 입장과 다행히 영화에 등장한 북한 사람 중 불이익을 당한 이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는 남북 교류의 물꼬가 터지기 직전에 개봉되어, 북한 체제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이제 예술, 보건, 여성 등 각 분야에서 북한과의 교류가 시작될 것이다. 이때 남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무엇일까.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지니되 북한 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잊지말 것. 내 삶의 문제를 먼저 돌아보고,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지로 연대할 것. 북한을 먼저 만나본 안나가 남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값진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