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어둠 뒤, 멜랑콜리한 핏줄, 웨스 앤더슨의 <로얄 테넌바움>
2002-04-25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로얄 테넌바움>은 올해 최고의 영화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주어진 감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에서는 성탄시즌에 개봉되었다- 역자).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하며 시종일관 괴팍한 것이 도를 넘어 소중한 느낌을 줄 지경인 이 작품은 웨스 앤더슨의 세번째 장편영화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책을 원작으로 삼은 듯이 스스로를 소개하며 마법에 걸린 듯한 맨해튼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영화는, 자기들만의 과거에 갇혀 그 안에서 폐쇄된 삶을 살아온 한 가족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특유의 판타지는 바로 이것이다. “그대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으리, 그러나 그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앤더슨은 98년작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자의식 강한 주인공 영웅 맥스에다가 3을 곱하고는 그 소년이 미래에 맞음직한 불행을 추정한다. <로얄 테넌바움>은 테넌바움 일가가 “20년간의 실패와 배신과 비극을 겪은 뒤” 맞게 된 임시적인 재결합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꾸민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과 그 아내 애슐린(안젤리카 휴스턴)의 세 아이들은 천부적 엘리트이며 귀족들이다. 경제에 밝아 부동산 투자 전문가로 성장하는 채스, 극작가 마고, 그리고 테니스 챔피언 리치 등 그들은 모두 신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사의 비극을 겪으면서 그들은 마치 추방당한 왕족처럼 삶의 방향을 잃고, 그들이 잃어버린- 그러나 실은 존재한 적도 없는- 위엄을 갈구한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긴 배우 오언 윌슨과 함께 이 영화 각본을 집필한 앤더슨은 테넌바움 가족의 신화와 그 여파를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축조한다. 그들의 재결합을 축으로 이야기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부재한 아버지에 대해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채스(벤 스틸러)는 아내마저 잃으면서 더욱 분노에 차게 된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자의식으로 날카로운 입양아 출신의 우울한 마고(기네스 팰트로)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으며 그렇다고 집을 떠날 결심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셋 중 막내인 괴짜 얼간이 리치(루크 윌슨)는 세계를 여행하던 중 마고가 또 한명의 절망에 빠진 인물 랠리 세인트 클레어(빌 머레이)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요한 테니스 챔피언십 경기를 망치는 불운을 겪는다.

이것은 가족극인 만큼 테넌바움 가족은 일종의 재결합을 맞게 된다. 계기를 제공한 것은 엄마다. 공허한 듯하면서도 매력적이게 냉담한 애슐린이 부드러운 매너의 회계사 헨리 셰먼(대니 글로버)과 결혼하기로 함에 따라 자녀들이 태어난 순서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채스가 제일 먼저, 엄마 없는 두 아이와 함께 집으로 오는데, 그들은 모두 빨간 추리닝 차림이다. 마고는 엄마의 변화에 분노를 느낀 채 집을 찾아오며, 곧이어 리치도 돌아온다. 테넌바움 가족세계를 이끄는 주요한 힘인 ‘형제간의 경쟁심’은 리치의 친구이자 유쾌할 정도로 잰 체하는 소설가 엘리 캐시(오언 윌슨)에 의해 더욱 불붙는다.

가족들의 재회를 완성하고 아내의 결혼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로얄 역시 집으로 돌아온다. 한때 유망한 법조인이었던 이 부드러운 곱슬머리의 말썽꾸러기는 분홍색 셔츠에 엉뚱한 양복을 걸치고는 가족을 찾는다. 해크먼이 보여주는 역겨운 매력의 일부는 그가 관객의 동정을 얻기 위한 어떤 바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그의 부끄럼 없는 교묘한 속임수들은 온전히 테넌바움 가족을 향해 조준되어 있다. 로얄은 애슐린에게 그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6주 시한부 인생이라고 거짓말하는데, 이게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말을 듣고서도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다.

테넌바움 가족들을 하나하나 한데 모아 조율을 하는 이 야심찬 지휘에 있어서,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장 르누아르에 대한 앤더슨의 경외감은 그 존재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또한, 가정적이고 가족적인 일요일 아침의 신문만화 같은 결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마고가 거의 언제나 털코트 차림이듯 리치는 늘 땀흡수용 머리띠를 두르고 등장하며 헨리는 예외없이 나비넥타이를 착용하고 나타난다. 연필 한 자루를 늘 머리에 꽂고 다니는 애슐린은, 하나 이상의 감정에 치중할 수 있어보이는 고독한 인물이므로, 확실히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어른(다운)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웨스 앤더슨의 전작인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낭만적 감성이 <로얄 테넌바움>에는 결여되어 있다. 이에 대해 앤더슨은 때로는 좀 거슬려보일 듯한 변덕스럽고 기발한 기벽들을 모아 과도할 정도의 보상을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똑똑하고 영리한 장치들의 막을 걷어내면 멜랑콜리한 핏줄이 보일 것이다. 테넌바움 가족들이 시간의 손을 다시 되돌리려 노력하는 가운데, 그리움과 동경에 찬 포크록에 실려서, 지나치게 밝은 빛깔들의 세계 갈피갈피로 말이다. 이 영화의 주요한 로맨스는 부모 자식간의 것이다. 받아들이고 용서하려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적인 열망을 보라. 마고를 아이스크림 집으로 데려가려는 로얄의 뒤늦은 노력만큼 이 영화에서 슬픈 대목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로얄과 채스의 마지막 화해로 이어진다.

<로얄 테넌바움>은 모든 택시가 낡고 박살난 채 불법영업을 하고 있으며 노스 다코타의 병원조차 겨울바람 차가운 휴스턴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대안적인 우주를 창조해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뉴욕의 늦가을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날씨는 어두운 구름으로 뒤덮이고 춥지만, 인간관계들은, 아무리 신경증적 환자들의 노이로제같이 보일지라도,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족의 성(姓)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뜻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빌리지 보이스>2001.12.18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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