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박창학의 <희생>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2018-10-16
글 : 박창학 (작사가)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출연 앨런 에드윌, 수잔 플리트우드 / 제작연도 1986년

때는 1990년대 초반, 한국영상자료원이 우면산 아래에 있던 시절로,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 3, 4학년 무렵부터 3년 반의 교사 시절까지의 몇년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열심히 영화를 본 시기였다. 수업을 마치면 혜화동에 있던 모 영화클럽에 들락거리고, 희귀한 작품이 있다는 소문의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다니며 매일같이 비디오를 빌리고 반납하는 일은 조금도 귀찮지 않았다.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은 이른바 명작들을 책으로라도 뒤져보며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 궁금해했고, 자막도 없는 비디오를 보며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내용을 상상하는 묘한 관람방식도 그땐 당연하게 생각했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건 그때부터의 습관이지만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영화관에서 틀어주지 않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내게 영화란 곧 비디오였다. 빈 시간에 교무실에 앉아 일본어를 외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는데, 이유는 단 하나, 영화클럽에서 빌려온 복제판 외국영화의 대부분에 일본어 자막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절 한복판에 이 영화를 만났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희생>을 틀어준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평일 낮에 양재동까지 영화를 보러간다는 건 목동의 직장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며칠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친한 선배 선생님을 졸라 수업시간을 바꿔서 결국 나는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건, 영화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지, 어떤 그림을 보여줄 수 있는지,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는 체험이었다. 마녀의 몸이 홀연히 떠오르는 장면, 집 한채가 불길에 휩싸여가는 장면, 되풀이해 흐르는 <마태수난곡>, 드문드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까지, 그날의 모든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막연하게나마 영화를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공부는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것이지 만드는 것에 대한 건 아니라는 결심이 굳어진 것도 범접할 수 없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년쯤 뒤에 정말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 공부를 하겠다고 유학길에 오르게 될 줄은 그때의 나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데에는 그날의 ‘땡땡이’ 체험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생의 방향을 틀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몇년 동안 영화를 공부한 성과를 이후의 내 인생에서 제대로 구현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그 선택을 후회한 일은 없으니 아쉬움은 없다.

지금도 생각이 나면 이 영화를 본다. 타르코프스키의 모든 작품은 비견할 것이 없을 만큼 경이로운 인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에는 각별한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평생 보고 또 보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영락없는 ‘내 인생의 영화’다.

박창학 작사가, 프로듀서. 음악을 만들고 소개하는 일 이외에도 음악과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번역한다. 영화 관련 번역으로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비평선 <영화의 맨살>, 오즈 야스지로의 산문집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산문집 <우나기 선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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