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죄 많은 소녀>의 구조가 특별한 이유
2018-10-18
글 : 윤웅원 (건축가)
우리는 터널을 지나고 있다

※<죄 많은 소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건축설계가 직업인 내가 연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항상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내가 영화에 관심이 있는 것은 ‘서사 구조’이다. 하지만 <죄 많은 소녀>(2017)에서 전여빈의 연기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기가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전여빈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를 본 후, 또렷하게 그녀의 연기가 기억에 남았다. <죄 많은 소녀>에서 다른 배우들은 다소 산만하게 보이고 일부는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특히 교장선생님과 교사들이 나오는 장면들에서 보이는 전형성은 집중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전여빈만이 일관된 자기 세계를 갖고 가고 있다.

나는 전여빈의 훌륭한 연기가 배우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녀가 일종의 터널 같은 형태의, ‘어떤 제한된 세계’를 통과해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에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렴풋하게 상상할 수 있는 이 세계는 나머지 세상을 외부로 밀어낸다. <죄 많은 소녀>에서 영희(전여빈)가 친구 경민(전소니)의 죽음 후에 통과하게 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관성은 전여빈이 연기하는 역할에 동일한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다른 학생들에게 친구의 죽음은 지나가버릴 소동이다. 영화 속 수학 선생님의 표현을 빌린다면 6개월만 지나면 모두 다 잊힐 기억이고, 결국 자신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수학 공식, 영어 지문 하나 더 외워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살한 경민의 마지막 ‘터널’에 동행했던 영희는 다르다. 그녀는 이제부터 자신을 가두어놓는 ‘어떤 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죄 많은 소녀>에는 한강 굴다리가 중요한 배경으로 나온다. 굴다리의 방범카메라에 실종된 경민의 마지막 모습이 찍혀 있다. 그리고 이 굴다리에 경민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이 영희다. 경민이 한강 다리 위에 소지품을 남기고 실종된 후, 영희가 그날 밤 경민에게 했다는 말들이 흘러나온다. 영희가 경민에게 자살을 부추겼다는 말들이다. 소리가 녹음되지 않는 방범카메라 장면은 거꾸로 경민과 영희의 말들을 증폭시킨다. 강변도로와 올림픽도로 때문에 생겨난 한강의 굴다리들은 도시와 강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건축이 전이공간을 다룰 때 여러 단계로 분절시켜 계획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토목 구조인 터널은 단순하고 직접적이다. 따라서 굴다리를 지나 한강에 도착하면 갑자기 달라진 공간의 크기에 놀라기 마련이다. 이런 감각은 특히 굴다리의 폐쇄성 때문에 더욱 강조되고 있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처럼 굴다리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영화에 나오는 ‘청담나들목’이 다른 한강 굴다리들과 다른 점은 휘어져 있다는 거다. 따라서 굴다리 안을 걸어갈 때, 밖이 보이지 않는 구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굴다리의 한쪽 벽은 거울처럼 비치는 스테인리스 금속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청담나들목을 걷는 사람들은 터널 끝 대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이렇게 휘어진 터널의 형태와 거울 벽은 굴다리를 단순히 통과의 과정이 아닌, 터널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 많은 소녀>에서 다른 사람들 모두가 갖게 되는 영희에 대한 의심은 영희 혼자서 지나가야 하는 터널을 만들고 있다. 아니, 의심은 영희 자신으로부터도 생겨나고 있다. 영화에서 영희는 실체적인 상처를 몸에 남긴다. 이 상처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영희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통과하는 어떤 길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 마음의 터널은 실제의 굴다리로 영희가 지나가는 세상을 상징하고 있다. 경민만이 알고 있을 자살의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영희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게 된다. <죄 많은 소녀>의 구조가 특별한 점은 공간과 이야기가 동기화되었다는 점이다.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은유는 경민이 마지막으로 걷는 청담나들목, 의심이 만들어내는 영희의 세계, 딸의 자살의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경민의 엄마, 사회에 나오기 전 학교 시절 등 반복적으로 <죄 많은 소녀>에 나타나고 있다.

영화의 시작은 학생들로 붐비는 어두운 학교 현관 복도이다. 학교를 터널처럼 제한된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이 장면은 어떤 사건이 학교를 관통할 것이라는 암시처럼 보이게 한다. 투신자살로 의심받는 경민의 실종 이후, 선생님들과 학생들과 형사들과 경민의 엄마가 갖고 있는 영희에 대한 의심은 천천히, 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영희를 고립시킨다. 영희가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자해한 후, 그리고 경민의 유서가 뒤늦게 발견된 후, 사람들은 영희를 의심했던 사실을 뉘우치고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키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스스로를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바로 영희 자신이다. 성대가 망가져서 말을 할 수 없는 영희는, 교실에 돌아온 첫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화로 말한다. 너희들이 원하는 멋진 죽음을 실현해주겠다고….

<죄 많은 소녀>에서 또 다른 터널에 갇혀버린 인물은 경민의 엄마(서영화)다. 딸의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영희에 대한 의심을 거두는 것이 불가능하고, 영희를 의심의 세상에 계속해서 가두어놓고 싶어 한다. 영희에게 이 의심을 거둘 수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경민의 엄마도 똑같이 자살한 사람의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희는 이 ‘의심의 터널’을 나오는 데 실패한다. 경민의 엄마가 나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희가 청담나들목 끝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터널의 밖은 밝은 빛이 아니다. 터널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싸여 있다.

나는 <죄 많은 소녀>가 처음에 약간 혼돈스러웠다. 구조가 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발유를 마시고 자해하는 장면 전후로, 사회성 있는 전반부와 후반부 복수극의 혼성교배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이는 난데없다는 느낌을 주어서 영화에 반감이 들게 한다. 나는 두 번째 영화를 보았을 때에야 ‘터널을 지나고 있다’라는 구조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이 구조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청담나들목의 내부는 2008년에 내가 설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죄 많은 소녀>에 청담나들목이 나오는 것은 마치 영화에 내가 나오는 것처럼 반갑고 신기했지만, 이 사실이 내가 영화를 똑바로 보는 것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