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 톱스타 잭슨(브래들리 쿠퍼)이 가수의 재능을 가진 앨리(레이디 가가)를 발견한다. 작은 라이브바에서 그들은 서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에서 이 순간은 짤막하고 강렬하게 그려진다. 잭슨과 앨리의 시선이 교차되는 리버스숏을 보면서, 관객은 영화가 평범한 클래식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뛰어넘게 될 것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화려한 공간과 익숙한 샹송 <La Vie en Rose>의 등장만으로 이러한 교감은 선명해진다. <스타 이즈 본>은 1937년 만들어진 원작의 주인공 관계도를 그대로 사용하는 영화다. 시작부터 전개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첫 영화의 오리지널 스크립트는 구성 그대로 활용된다. 다만 인물을 배우 아닌 가수로 설정했기에, 1976년 만들어진 프랭크 피어슨 감독의 영화와 분위기는 더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음악영화의 포맷을 잘 살려서 완성됐고, 남자주인공 잭슨의 시점을 이전보다 깊이 파고든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구분된다. 특히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맡아 화제가 된 브래들리 쿠퍼 중심으로 영화를 살피면 더 많은 장점이 발견된다. 남자배우가 지닐 수 있는 극단적 모습을 이용해 브래들리 쿠퍼는 스스로를 도약시키고 있다. 이러한 감상의 기저에는 ‘마초적 인물’이 지닌 전형적 매력이 도사린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도 꽤나 만족스럽다. 평소 익숙한 댄디한 모습이 연출자의 역할에 녹아들었다면, 브래들리 쿠퍼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캐릭터를 통해 우리는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로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인식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서 더욱 흥미롭다.
음악을 이용하는 방식에 있어 <스타 이즈 본>은 여타 음악영화들과 구별되는 행보를 보이는 영화다. 개인적으론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전의 음악영화들, 예를 들어 <라라랜드>(2016), <비긴 어게인>(2013)과 이 작품의 음악은 사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브래들리 쿠퍼가 연출자로 신경 썼던 부분도 ‘노래가 침입하는 방법’에 있다. 직접 현장에서 연기자들이 노래했던 사운드트랙은, 단순히 정직한 캐릭터의 감정 전달만을 위해 할애되지 않는다. 인물들이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다는 점을 백분 활용해서, 영화는 스토리의 한계를 이탈하지 않은 채 노래를 등장시킨다. 즉, 음악이 주는 스펙터클의 요소를 미장센과 일치시키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수의 무대는 관객이 아니라 공연하는 자의 입장에서 진열되며, 노래가 등장해야 하는 순간에 연결된다. 심지어 레이디 가가의 목소리 아래로 회상의 몽타주가 연결될 때조차 재생되는 음악은 노래의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다. 흡사 <500일의 썸머>(2009)에서 느꼈던 몽타주 시퀀스의 기술적인 압축 효과를 이번 영화에서 찾기는 어렵다. 연기자 기준에서 캐릭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래는 프로로서 노래하는 자들이 가진 내면을 보다 솔직하게 표출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음악이 주는 스펙터클의 요소를 미장센과 일치시키다
앨리를 연기하는 레이디 가가의 음색은 분명히 아름답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영화는 기대 이상의 감상을 주지는 않는다. 특히 후반부에 이르러 팝스타로 변신한 앨리의 모습은 익히 알고 있던 그녀의 레퍼토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만일 누군가 이 작품을 무미건조하고 평범한 리메이크라고 평한다면, 이건 그 지점의 실패로부터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라쿤 목소리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더욱더, 브래들리 쿠퍼라는 재능 있는 배우가 자신을 채찍질하는 강도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다재다능한 배우였지만, 적어도 ‘가장 매력적인 남자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 속 그의 모습은 반전을 준다. 목소리는 한 옥타브 더 낮아졌고, 짙은 수염과 얼굴의 주름 탓인지 캐릭터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풍성해졌다. 흡사 클라크 게이블이나 대니얼 크레이그가 연상될 정도다. 이와 비교해 여주인공 앨리의 캐릭터는 어느 정도 소모되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주인공의 상향적 성공이 아닌, 남자주인공 중심의 ‘하강의 카타르시스’에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이 유발하지 않은 우연적 시련으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둘의 사랑이 싹트기 이전에 이미 내부적으로 문제점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고의적이지 않은 과실이 이들 커플을 불행하게 만든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그녀와의 일상은 순식간에 암흑이 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에는 연민과 슬픔이 생긴다.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누구도 없을 것이라고, 비극적인 플래시포워드는 말하고 있다. 실제로 드랙퀸 클럽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영화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또 다른 버전처럼 스스로를 무겁게 드러낸다. 한마디로 <스타 이즈 본>은 이전 버전의 영화들이 가진 ‘할리우드 드림’의 요소를 재탕하지 않는 영화다. 이 점은 다만 물리적으로 활용될 뿐, 영화의 감상은 오히려 이와 반대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팝의 아이콘으로 성장하게 된 여주인공, 그녀와 대비되어 제자리에서 맴도는 남자주인공의 이야기가 예상대로 비극적 상황을 맞는다. 단조로운 모노코드의 이야기와 필연적인 아픔들, 이는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를 아는 시네필들도, 또는 그저 짐작하는 일반 관객에게도) 모두가 짐작하는 하강의 드라마가 ‘어떻게’ 생겨날지에 대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수순의 비극을 향한 기대치가, 파국을 예상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당혹스러움과 엇갈려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는 것이다. 언뜻 무미건조할 수 있는 영화의 멜로드라마는 이렇듯 결말에 이르러 중반부의 지지부진함을 걷어낸다. 특히 잭슨이 사라진 뒤 앨리가 울부짖는 마지막 콘서트 장면에서, 잭슨을 통해 드러나는 신파적 감상의 회상으로 영화는 비장미를 갖추게 된다. 너무도 익숙한 흐트러진 낭만주의가, 또다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
남성성의 모델이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여성성에 있어서도 새로운 모델이 필요한 법이다. 설혹 영화 속 앨리 역할이 이전의 캐릭터에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레이디 가가의 실제 행보는 ‘<스타탄생> 시리즈’의 남자주인공 잭슨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 선택법은 최근 ‘007 시리즈’가 보였던 방법과 흡사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중립적이고 새로운 여성 이미지를 통해, 익숙한 남성의 모습을 뒤집는다. 앨리 캐릭터가 팝스타 레이디 가가의 실제 모습과 겹치면서, 컨트리가수 잭슨의 마초적인 매력은 리뉴얼된다. 브래들리 쿠퍼는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장르의 효율성과 익숙함을 이겨내고 스토리의 단순함과 도덕적인 공식을 뛰어넘으며, 영화는 또 다른 작품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스스로 도약하고 있다. 어쩌면 데자뷔로서 작동하는 영화의 모든 미덕이 이 안에 담겨 있다. 스타가 태어나고, 이미 떠 있던 다른 스타는 저물어간다. 너무 닳아서 마모된 이야기이지만, 현실로부터 떨어진 연애 판타지는 여전히 안락하다. 이토록 진부한 할리우드의 러브 스토리가 주는 만족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