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백>의 장섭(이희준) 캐릭터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엇갈린다. 여성주인공의 위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도움을 주는 남성 캐릭터라고 호평하는가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장섭이 여성의 연대라는 주제의식을 해친다는 불만도 있다. 나는 캐릭터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관심 없다. 다만 극중 장섭의 역할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다는 사실만이 나의 관심이다. 사건의 개입에 용이한 형사 장섭의 역할은 두드러진다. 반면 백상아(한지민)와 김지은(김시아)의 행위는 ‘약자의 연대’라는 주제 차원에서만 사후적으로 풀이된다. 경찰서에서, 터미널에서, 공사 중인 공터에서 장섭은 위기에 처한 백상아를 돕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도 <미쓰백>이 상아와 지은의 이야기로 남는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언하면 <미쓰백>은 드러나는 액션으로서의 서사보다 꾹꾹 눌러진 감정의 서사가 더 중요한 영화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미묘하게 그려지기에 그만큼 포착하기 어렵다. 미묘한 선택들이 익숙한 설정의 곁가지로 환원될 위험 역시 존재한다. 상아와 장섭의 관계가 한 남자의 순애보처럼 해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아와 지은의 관계 역시 ‘모성’의 코드 아래서 이해되곤 한다. 둘의 관계가 모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모성 재현의 포화 속에서, 모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성취인 시대다. <미쓰백>은 ‘엄마 되기’를 지속해서 호명하고 어머니로부터 전해온 상처의 대물림을 짚지만, 끝내 상아를 통해 어떤 모성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상아가 하고자 하는 것이 정말로 ‘엄마 되기’라면 그것은 정의되지도, 묘사되지도 않은 채 도중에 멈춘다. “단 며칠 만이라도 엄마 해라”라는 장섭의 대사만 남을 뿐 상아와 지은이 함께했을, 혹은 함께하지 못했을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생략이다. 영화는 모성을 새롭게 쓰기 위해 일단 모성을 쓰는 것을 거부한다.
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두 여성의 관계
모성에 관한 영화적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지은의 입원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던 상아가 ‘관계’를 쓰는 칸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이때 지은이 나타나 상아를 잡아끌면서, 둘은 입원을 포기한다. 끝내 칸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칸은 채워지지 않았어야 했다고 믿는다. 이 의도적 실패가 관계의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계의 빈칸은 이들의 관계가 애초에 불가능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도 보이고, ‘모성’이라는 단어로 이들의 관계를 환원하지 않으려는 영화의 의지로도 보인다. 에필로그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풀이된다. 단란한 가정의 일원이 된 지은의 아침 풍경 속에 상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숏은 지은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의 롱숏이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간격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칸이다. 정의되지 못한 관계는 진한 감정의 파고를 남기고, 그것은 모성의 틀로 환원될 수 없다. 이들의 관계가 모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지은의 캐릭터가 묘사되는 방식 때문이다. 영화는 성인 여성과 어린 여자아이간의 필연적인 힘의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는 지은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아가 지은에게 요구한 ‘미쓰백’이라는 호칭은, ‘아줌마’, ‘선생님’ 등 나이나 권위를 떠나 수평적 관계를 쓰려는 신호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지은은 연약한 피해자로 그려지기보다 의사 표현이 분명한 적극적인 주체로 묘사된다. 이를테면 상아와 지은이 만난 첫날의 포장마차 장면에서 지은은 상아의 손을 슬며시 잡고 놓지 않으며 자신이 위기에 처했음을 분명히 표시한다. 월미도 놀이공원 장면에서 상아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지은의 손길에 놀란다. 이 장면은 상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상아와 친모의 관계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순간적으로 상아와 지은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기능을 한다. 나에겐 후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모성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역류한다. 터치와 포용은 의외로 지은으로부터 상아에게로 향한다. 숙소에서 상아가 내보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도 지은의 손길이다. 이 순간에는 그 어떤 플래시백이나 서사상의 개입도 등장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의 모습만을 오롯이 비추면서 비로소 두 사람만의 감정이 탄생했음을 표시한다. 이제 상아는 지은을 통해 죽은 엄마를 애도하는 대신, 지은과의 관계를 위해 기억 속의 엄마와 대화한다.
상아와 지은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 제시된 지은의 주체성은 그러나, 무력하거나 무해하게만 그려지는 아이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이상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엄마에 관한 콤플렉스로 엄마 되기를 두려워하는 상아의 치유를 위해 지은의 고통이 사용된다고 누군가가 비판한들 영 틀린 말로 생각되진 않는다. 그러나 지은에게 가해진 학대의 재현에 관한 문제 제기가, 실은 학대당하는 아이라는 프레임 속에 지은을 욱여넣은 탓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지은을 실제 학대당하는 어린아이로 인식해야 할지, 영화적인 캐릭터로 인식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지은의 탈출 장면 때문이다. 지은은 ‘미쓰백’에게 가기 위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화장실의 좁은 창문을 통해 집에서 탈출한다. 이 장면이 리얼리티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장면이 관객에게 스릴러 장르 영화에 가까운 긴장감을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 장면이 지은의 캐릭터를 연약하지만, 의지와 힘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했다.
폭력 재현에 관한 비판에 덧붙여
여성 캐릭터의 재현에 관한 고민은 필연적으로 다른 약자의 재현에 관한 고민과 맞닿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미쓰백>은 여성 캐릭터와 여자아이 캐릭터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여성 캐릭터만큼이나 많은 아이들이 영화에서 피해자로 등장하며, 때로는 죽거나 유괴당한다. 여성 캐릭터가 주로 수동적인 피해자로 묘사되어 온 데 대한 불만으로 능동적으로 묘사된 캐릭터를 환영하게 된 상황과, 지은의 캐릭터 재현 방식을 겹쳐본다면 딜레마는 더욱 커진다. 지은은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속 피해 아동의 묘사와 달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를 환영해야 하는가, 직접적인 재현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가. 상아와 지은의 상처는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한 필연적인 전제였고, 관객에게는 이들의 감정에 공감하기 위해 이들의 상처가 필요했다. 지은의 학대 묘사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굳이 영화에서 폭력을 재현하지 않아도 학대 아동들이 겪는 피해를, 두 사람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동을 향한 폭력은 재현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피해 아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고통 때문은 아닐까. 영화의 오락성을 강조하며 현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을 외면하는 흔한 반응과 <미쓰백>의 폭력 재현에 관한 비판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미쓰백>은 아이의 숨소리로 사운드를 가득 채우며 관객을 지은이 있던 자리에 잠시라도 있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어두운 화장실 구석에, 차가운 베란다 바닥 위에, 차갑고 위태로운 난간에 당신은 있었나. 혹은 굳이 그런 방식으로 감각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