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콘텐츠는 결국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CJ문화재단이 신인 스토리텔러를 육성하기 위해 진행하는 ‘스토리업’ 프로그램은 미래의 스토리텔러를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강연를 통해 한국영화계를 이끌 미래의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을 넓혀주고 소재 개발을 돕는 자리다. 10월 26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두 번째 스토리업 강연자로 나선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영화로 보는 대중음악’을 주제로 세계로 뻗어나간 한류 음악과 아이돌 산업, 뮤지션의 생애와 음악계 전반의 디테일이 이야기로 확장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에 대해 강연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과 영화와의 연계, 음악 사용이 돋보였던 영화 등 임진모 평론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와 대중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전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내가 대학생 때, 영화시장의 자본규모는 음악계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영화산업은 콘텐츠업계에서 게임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현재 음악시장은 영화계의 5분의 1이 안 되는 규모다. 음악시장이 줄어든 원인은 세대가 분리됐기 때문이다. 전 세대가 함께 듣는 음악, 장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제 대중음악이라는 말이 등장할 수 없다. 지금 실시간 차트에 올라가 있는 곡들을 5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전혀 모를 것이다. 과거의 조용필 같은 국민가수, 다시 말해 아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전 세대가 좋아하는 뮤지션은 이제 없다. 지금 젊은 가수 중에 옛날 음악을 찾아보는 가수가 있는가. 방탄소년단(BTS)의 <IDOL> 가사에 ‘얼쑤 좋다’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옛날 음악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영화와 음악이 공생하는 길
1996년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영화는 세기말의 불안감, 청년들의 반항, 퇴폐,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전복하려는 정서를 잘 담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으로 ‘X세대’라는 표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90년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즐겼던 결정적인 이유는 음악에 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대표곡들이 영화에 모두 담겨 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세 가지 장르는 그런지(얼터너티브 록), 갱스터랩, 테크노다. 이러한 1990년대 음악의 핫 트렌드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이다. 그렇기에 90년대 말 이전의 노래들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주목받게 된다. 이기 팝의 <Lust for Life>라는 곡은 이 영화를 통해 대박을 터뜨리고, 후에 이기 팝은 광고에도 출연하며 큰 인물로 성장한다. 테크노와 록의 요소를 잘 결합한 언더월드의 <Born Sleepy> 역시 영화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때 카페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틀기가 바빴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언더월드의 <Born Sleepy>가 과연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O.S.T가 아니었다면 히트곡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이 곡이 독자적으로 음악만으로 승부했다면 절대 싱글 차트에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트레인스포팅>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노래가 바로 <Born Sleepy>다. 그리고 그 당시 세기말 청년들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면서 이 곡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작가들에게는 과거의 트렌드를 잘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대세가 된 흑인음악
지금의 트렌드는 어떤가. 올해 2월 개봉한 <블랙팬서>(2018)를 확인해보자. 팬서(Panther)라는 표현은 1960년대에 유행했다. 1960년대 미국 흑인들은 솔과 펑크라는 장르를 통해 강한 자의식을 갖게 된다. 솔과 펑크에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사회와 싸우겠다는 정신이 담겨 있다. 당시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급진적인 젊은이들을 히피가 아닌 이피(Yippie)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들이 스스로를 팬서, 표범이라 표현했다. 당시 백인들은 이에 맞서 ‘화이트 팬서’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하고, 무려 9곡의 O.S.T가 싱글 차트에 오른다. 영화 속 음악이 싱글 차트에 일제히 오른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등장하는 <All the Stars>, 그리고 <Pray for Me> 두곡이 2018년 최고의 히트곡이 됐다. 한국 관객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All the Stars>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뮤지션 SZA가 콜라보로 참여한 곡이고, <Pray for Me>는 흥행 보증 수표인 켄드릭 라마와 더 위켄드라는 두 영웅이 만든 곡이다. 어쨌든 두곡을 모두 맡은 뮤지션 켄드릭 라마의 이름은 꼭 기억해두라. 켄드릭 라마는 핫한 음악보다는 쿨한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이다. 여기서 ‘쿨하다’는 표현은 힙합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지금 전세계의 힙합은 상업화되고,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변했다. ‘스왜그’라는 표현이 이 현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용어라 생각한다. 힙합이 트렌드가 되면서, 힙합을 해야 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써의 음악, 힙합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가기 위한 수단이 됐다. 그렇지만 켄드릭 라마는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의 인종차별, 흑인 인권 문제에 대해 말하는 뮤지션이다. 그런 켄드릭 라마가 흑인들의 강한 자의식을 담은 영화 <블랙팬서>의 O.S.T를 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또 에미넴이 있다. 에미넴은 호흡이 아주 길고 강한 악센트를 가졌다. 나는 그의 랩에 대해 ‘마치 벌의 독침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미국 흑인 사회에서 인정받은 백인 래퍼다. 에미넴은 수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를 알게 된 건 바로 영화 <8마일>(2002) 덕분일 것이다. 이 영화의 O.S.T는 아카데미 음악상 사상 최초의 쾌거를 이뤄낸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크게 흥행한 곡 <Lose Yourself> 역시 영화 <8마일>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초로 랩/힙합 장르에 음악상을 수여한 사례가 <8마일>이다. 이것은 랩이 완전히 주류 장르에 안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곡과 선곡과 스코어, 그리고 한국의 영화음악
영화음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영화에 삽입된 테마곡, 주제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 곡 말고, 영화 속에 계속 배경음으로 깔리는 연주음악이 있다. 대표적인 영화로 <스타워즈> 시리즈를 떠올려보라.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에 배경음이 연주된다. 이처럼 영화의 전편에 흐르며 배경이 되는 진짜 음악을 스코어라 한다. 사실 영화음악과 관련해서 단일 주제곡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여러 곡의 스코어다. 한국영화가 발전하기 위해 작가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스코어를 비롯한 영화음악의 발전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스코어 작곡가들이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스코어 작곡가는 시나리오작가와 긴밀히 협업하며 긴 과정을 거쳐 음악을 만든다. 클래식의 힘이 약해지고, 대중음악만이 흥행하는 사회에서, 영화음악은 현대의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음악이다. 우리나라도 스코어 작곡가, 각본을 쓰는 작가를 양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동안 한국영화 O.S.T는 스코어 대신 후반작업이라 할 수 있는 선곡에 의한 곡 삽입 위주였다. 그게 아쉽다. 앞으로 새로운 세대의 창작자들이 이 부분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저작권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감독들에게는 특정 장면에 쓰고 싶은 음악이 정해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창작곡은 위험 부담이 있으니, 기존에 알려진 곡을 영화 속 장면에 삽입하고 싶을 텐데, 저작권 승인이 안 돼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1998)이다. 조영욱 음악감독은 로네츠의 <Be My Baby>라는 곡을 사용하려 했는데, 승인을 받지 못해 할 수 없이 클리프 리처드의 <Early in the Morning>을 대신 선택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장면에는 <Be My Baby>가 어울리긴 했다. 이렇게 저작권 승인을 받지 못해 음악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시 조영욱 음악감독의 <접속>(1997)은 영화음악 선곡에 있어 본격적으로 저작권의 개념을 고민하기 시작한, 한국영화계가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에 접어들 때의 분기점 같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3개의 대표적인 음악이 나온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The Look of Love>,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다. 이 세곡에 의해 당시 한국 음악시장의 흐름이 완전히 바뀐다. 이때부터 복고, 즉 옛날 음악이 팔리기 시작했다. 또한 <접속>은 한국에서 공식적인 저작권 획득 과정을 통해 외국곡을 삽입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또한 <접속>의 O.S.T 음반 판매량은 무려 80만장이었다. 이후 영화에 음악을 삽입할 때 저작권료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실상 <접속> 이전에 우리나라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은 모두 불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인을 소재로 할 때 작가가 알아야 할 것
음악과 영화가 공존하게 되면, 음악 혹은 뮤지션을 주제로 한 영화도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20세기 가장 많은 대중과 호흡했던 장르는 음악이다.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의 사례를 떠올려봐라. 뮤지션의 생애 자체가 많은 영화에 담길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도 여러 편의 뮤지션 다큐 영화가 개봉했다. 휘트니 휴스턴의 일생을 담은 <휘트니>(2018)와 쳇 베이커를 소재로 한 <본 투 비 블루>(2015), <보헤미안 랩소디>(2018)는 밴드 퀸과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듯 음악가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는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라 전망한다. 그렇기에 영화계에서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도 음악을 알아야 한다. 모든 뮤지션들이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상상력으로 풀어내느냐가 문제다. ‘우리나라의 뮤지션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인물을 다루어야 할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내가 떠올린 인물은 <빙글빙글> <인디안 인형처럼>의 주인공 나미다. 나미의 남편은 최봉호인데, 그는 바로 조용필, 이주일이라는 위대한 연예인 둘을 키워낸 인물이다. 언젠가 나미의 생애를 담은 시나리오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또 우리나라 음악가 중에서 지금의 아이돌 그룹, 댄스 그룹 멤버들까지도 영화로 풀어냈을 때 흥미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예전에 BTS의 RM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BTS 멤버들 자체로도 훌륭한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어마어마한 피, 땀, 눈물 속에서 성장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BTS는 처음에 힙합 그룹으로 시작했다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아이돌 댄스 그룹이 됐다. 그 과정에서 슈가나 제이홉 같은 멤버는 정말 살기 위해 춤을 춰야만 했다. 하루에 12시간씩 춤을 췄다고 했다. 그런 훈련 과정을 통해 마치 칼로 몸을 써는 것 같은 강력하고 정확한 춤을 추게 된 것이다. BTS, 엑소, 소녀시대부터 서태지, 신승훈까지 모든 대중음악 가수들의 이야기가 영화적 소재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상상력이 이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500일의 썸머>(2009)가 떠오르기도 한다. 영화에서 서로 다르게 좋아하는 비틀스 멤버 이야기를 나누며 두 인물간의 미묘한 거리감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이야기의 복선을 음악적으로 풀어가는 설정이 굉장히 좋다고 느껴졌는데,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가들도 뮤지션들과 음악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글을 쓸 때 평면적인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배경 지식이 담겨야 그런 매력적인 장면들이 나올 수 있다. 단순히 영화음악으로 사용되는 음악을 넘어, 폭넓게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교양을 쌓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