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봄> 권경원 감독 -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2018-11-08
글 : 이주현 | 사진 : 오계옥 |
<1991, 봄> 권경원 감독 -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1991년 봄에만 11명의 청춘이 국가의 불의에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자살을 방조하는 세력이 있다고 여론을 몰아갔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중 숨진 사건에 항의하며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필했다는 혐의로 구속·수감한 사건. 강기훈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며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편집자)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1991년 봄에 대학 신입생이었던 권경원 감독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의 첫 영화인 다큐멘터리 <1991, 봄>을 만들었다.



-대학 1학년 때 목격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오랫동안 부채의식으로 남았다고 했다. <1991, 봄>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인가.



=자기 반영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1년의 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 했을 때 주위에서 ‘지겹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비교해도 1991년에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1987년과 1991년 사이, 더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욕구가 있었고 또한 모두가 자기주장을 할 수 있던 때였다. 그 에너지가 분출되고 충돌했다. 혼란함의 절정이 1991년이었다. 매일 학교에서 전경들과 부딪혔다. 개인적인 감정들을 정리하고 싶었고, 왜 침묵할까에 대한 작가적 호기심도 더불어 작동했다.



-처음엔 극영화로 만들려 했다고.



=극영화 진행이 안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당시 강기훈씨에게 닥친 상황이 다급했다. 암 진단을 받았고, 재심이 시작됐지만 다들 결과에 자신 없어 하던 때였다. 언제 제작될지도 모를 이야기를 붙들고 있으면서 영화감독 놀이를 할 게 아니라 영상기록물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강기훈씨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그의 이야기를 꼭 내가 하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출연 제의를 했을 때 강기훈씨의 반응은 어땠나.



=출연과 관련해선 그의 미필적 고의도 있다. (웃음) 강기훈씨가 지인들만 초대한 연주회 자리에 나를 불렀다. 연주회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해서 드리면 좋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3대나 가지고 갔다. 녹음기도 사비로 빌렸다. 다큐멘터리에 쓸 목적으로 찍은 영상이 아니었다. 왜 나를 연주회에 초대했을까 생각해보면 찍어도 좋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웃음)



-그가 연주회에서 연주한 8곡이 영화에 사용된다.



=강기훈씨는 클래식영화 마니아다. 그가 선곡해 연주한 8곡이 모두 영화음악이다. <디어헌터>(1978)에 나온 <Cavatina>, <배리 린든>(1975)에 나온 <Sarabande> 등 영화의 맥락과 현재의 상황이 닿아 있는 선곡을 했더라. 결과적으로 그 음악이 <1991, 봄>의 이야기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강기훈씨뿐만 아니라 1991년의 봄에 가까운 사람을 잃고 그 기억을 여전히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여러 명 인터뷰했다.



=그들이 강기훈씨의 분신이라 생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최은희, 김구일 씨는 실제로 분신의 배후로 지목돼 수사까지 받은 경험이 있는 분들이다. 애도와 추모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다. 강기훈씨만큼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