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곡성>의 배우 서영희·손나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 새롭게 쓰여진다, 호러의 큰 즐거움"
2018-11-08
글 : 김소미
사진 : 오계옥
손나은, 서영희(왼쪽부터).

한국 공포영화의 오랜 자부심이었던 <여곡성>(1986)이 32년 만에 동명의 제목으로 리메이크됐다.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을 배경으로, 안방마님 신씨 부인과 며느리 옥분이 각자의 위치에서 집안의 악귀와 맞서 싸우는 이야기인 <여곡성>은 간추린 줄거리가 무색할 정도로, 곳곳에 배치된 아이코닉한 장면들로 꾸준히 회자되는 작품. 토속적인 소재를 활용한 기괴한 이벤트들을 따라가다보면 조선시대 신분제와 보수적 이념 속에 짓눌린 한 많은 여인들의 비련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낸다. 2018년 버전은 유영선 감독이 “여성 인물들의 누아르”라고 언급한 것과 같이, 자기 욕망과 개성을 보다 선명하게 실현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저력을 기대하게 만든다. <추격자>(2008),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2010), <마돈나>(2015) 등에서 독보적인 개성을 구축해온 배우 서영희가 신씨 부인으로,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손나은이 스크린 첫 주연작에서 옥분으로 분했다. 서영희와 손나은이라는 반가운 이름, 그리고 두 사람의 조화가 주는 의외성만으로도 클래식 호러에 가미된 트렌디함을 가늠해보기에 충분하다.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 이후 배우 서영희의 3년이 궁금했다. <탐정> 시리즈를 거치며 사설 탐정 강대만(권상우)의 아내인 미옥을 연기했는데, 1편보다 오히려 2편에서 캐릭터의 매력과 분량이 더해지는 걸 보고서 배우의 힘이 크지 않았나 실감했다.

=서영희_ 아!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다. 사실 지난 3년은 가정에 충실했던 시기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바쁜 시간을 보냈다. 첫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정신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잠깐 바깥바람을 쐬게 해준 작품이 <탐정> 시리즈였다. 정말 고맙지. 가정생활에서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상태에서 내 개인적 삶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배우로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작품들이었다. 적절한 균형을 잘 유지했다고 본다. 지난 3년간 내 상태에서는 최선치였다. 출연 분량에 대한 욕심은 없다. 물론 이제는 조금 달라질 것 같기도 하다. <여곡성>을 기점으로 바깥바람을 더 많이 쐬고 싶다. (웃음)

-서영희 배우가 극의 가장 중심이 되는 첫 번째 작품이 공포영화 <스승의 은혜>(2006)라고 볼 수 있는데, 손나은 배우도 스크린 첫 주연작으로 <여곡성>을 하게 됐다. 재밌는 우연이다. 둘은 평소에 호러영화를 즐겨보나.

=손나은_ 어릴 적부터 동생하고 꼬박꼬박 챙겨볼 정도로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연기할 때도 꼭 도전해 보고 싶었던 장르가 호러다.

서영희_ 겁이 많아서 평소에 따로 찾아보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호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유명한 호러영화는 거의 다 봤더라. 특히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유영선 감독님이 꽤 많은 작품을 추천해주셨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공포영화의 무서움 그 자체에만 집중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면서 호러 장르의 다양한 면모를 접하게 됐다. 앞으로는 즐겨보게 될 것 같다.

-유영선 감독의 전작도 공포영화 <마녀>(2013)였다. 잘 알려진 공포영화 마니아라고 들었는데, 감독이 추천한 작품 중 특히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온 영화가 있나.

서영희_ 난 <강시: 리거모티스>(2013)를 꼽겠다. 영화미술 측면에서 탁월한 작품이었다. 그레이 톤의 화면에 붉은 피가 물드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다. 공포영화가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 영화였다. 피가 징그럽고 무섭다기보다 아름답게 느껴지더라. 말하고 보니 좀 변태처럼 들리나?

손나은_ 옥분 캐릭터와 공통점이 있다면서 감독님이 <돌로레스 클레이븐>(1995)을 추천해주셨는데 굉장히 좋았다. <벌들의 죽음>이라는 스코틀랜드 소설 역시 감독님이 선물해주셨는데, 재밌게 읽었다.

-동그란 눈, 유독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 덕분인지 서영희 배우는 코미디영화에서도 늘 적임자 같았다. 한편 <스승의 은혜>, <궁녀>(2007)에선 처연한 얼굴로 호러영화에 어울리는 비극의 중심을 담당하기도 했다. 서영희는 두 극단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능란하게 소화한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배우다. 반면 손나은 배우는 이번 영화로 첫 호러에 도전했다.

손나은_ 우선 걱정스러웠던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웃음) 큰 스크린에 나와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드린다고 생각하니까 가능한 한 최대치의 섬세함과 집중력을 발휘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옥분은 호러적인 상황에서 리액션을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인데, 대본을 연습할 때 놀라는 타이밍의 연기를 미리 짜놓지 않으려고 했다.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나를 덮치는 느낌에 충실하자는 생각이었다.

서영희

서영희_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 일들이 영화 안에서 새롭게 쓰여진다는 점, 그게 호러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그냥 생각만 하던 것들, 예를 들어 귀신은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상상만했던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배우로서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런 몇몇 지점을 제외하면 가급적 장르의 틀에 영향받지 않으려는 편이다. 약간의 표현법이 다를 뿐, 드라마가 중요한 것은 다 똑같다. 작품 선택도 당연히 캐릭터와 감정선이 기준이다. 그러고 나서 코미디는 매 순간 유쾌하게 집중하면 되고, 호러는 비극적인 사건을 솔직하게 돌파하면 된다. 사실 특정 장르에만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가를 들으면 좀 속상할 법도 한데 대조되는 두 장르 모두 편안하게 어울린다고 평가해주시는 것 같아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신씨 부인과 옥분 모두 극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급변하는 지점이 있다. 신씨에겐 월아라는 한 맺힌 악령이, 옥분에겐 뱃속의 아이가 동력이 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인물이 겪는 안팎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 배우들에겐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 같다.

서영희_ 특히 신씨 부인은 그 변화가 매우 정확하고 극명한 편이다. 신씨 부인이 잠시간 편안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내 원래 성격과 맞으니 연기는 편했다. 오히려 어려웠던 것은, 관객이 믿을 만한 캐릭터의 중심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신씨가 본래 가지고 있던 강인함과 내면의 욕망이 분명히 보인 뒤에야만, 이후의 변화 또한 흥미롭게 전달될 테니까.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아우라도 중요했고. 아직 최종 완성본을 보지 못한 상태인데, 잘했을지 걱정이 많다.

손나은_ 옥분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악을 택하는 캐릭터라고 느꼈다. 초반과 마지막에서 상반된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메이크업, 한복의 색감 같은 인물의 외양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옥분은 천민 출신이라 극 초반엔 꾀죄죄한 때분장도 했고, 집안 사람들의 기에 눌려서 주눅들어 있는 모습을 강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보였으면 했다. 후반부에는 신씨 부인과 옥분에 이어 악이 계속 세습된다는 테마가 핵심이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서영희 선배님이 연기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처음 말씀드리는 거라 좀 민망하긴 하지만 선배님이 쓰는 말투와 제스처에 최대한 가까워 보이려고 노력했다.

-서영희 배우는 정신적·신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인물들을 연기하며 주목받았고, 극중에서 자주 죽음을 맞기도 했다. <여곡성>에서는 안방마님이 되어 집을 호령하는 신씨 부인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쾌감도 있더라.

서영희_ 신분이 갑자기 엄청 상승했다. (일동 웃음) 인물의 지위를 고려해야 하는데, 신씨가 사실은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신씨도 아래에서 위로 신분 상승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래서 계급적으로 아주 특별한 제스처를 더하려고 하지 않았다. 얼굴, 말투 하나하나 무언가 꽉 짜놓은 채 표현하면 오히려 뻔한 캐릭터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도식적인 표현을 경계했다. 평소에 내가 말을 조금 천천히 하는 편이다. 끝을 길게 빼면서 약간 흐리는 식으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 부분만 조금 더 강단 있게 잘 다독이려 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면 우선 나 자신이 불편해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 힘들다.

-오랜만에 긴 호흡으로 영화 촬영을 해서 남다른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서영희_ 하동, 괴산 등 오랜만에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숙박해가며 촬영했다. 촬영장 가는 길이 매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웃음) 오랜만에 밖에 나가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주셔서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촬영 시작 전에 나은이와 함께 액션스쿨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 신을 위해 액션 연습을 한 적도 있다. 최종적으로 조금 변경되긴 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엎어치기를 하는 등 나은이를 꽤 힘들게 했지. 개인적으로 호러적인 장면들에 CG가 더해져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예측해보는 점도 재미있다.

-두 사람 모두 연기하기 전엔 오랫동안 미술을 공부했고, 동국대 연극영화과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술에서 연기로 관심사가 옮겨가던 학창 시절엔 무슨 일이 있었나.

서영희_ 앞장서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기? 그런 건 나은이처럼 예쁘고 키 큰 친구들만 하는 줄 알았다. 텔레비전도 별로 안 보며 자랐다. 미대를 가려고 굉장히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려왔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 앞두고서야 내게 대단한 능력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그 당시 사는 곳 바로 옆에 연기학원이 있었는데, 무언가 읽고 연습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무의식중에 행복해지기 위해선 연기를 해야만 할 것 같더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그게 연기였다. 경험이 전혀 없진 않았다. 이상하게 주변에 배우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 쫓아서 오디션에 가기도 했다. 잊었던 꿈이 10대 후반이 되어서야 되살아난 셈이다.

손나은

손나은_ 나도 미술 공부를 꾸준히 하다가, 사촌동생의 오디션에 따라간 것을 계기로 덜컥 회사에 캐스팅됐다. 굉장히 뜻밖의 일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장기자랑 무대에 나가기 좋아하고, 친구들 앞에서 무언가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방과 후 활동으로 뮤지컬부 전단지를 받았던 때가 내게는 배우 활동의 어떤 최초의 순간이었달까. 내 안에 꿈틀거리던 연기 욕심을 발견했다. 회사에 들어와서는 연기자 연습생으로 있다가 가수 트레이닝을 받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도 있었다. 에이핑크로 합류하고도 계속 원하는 연기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한다.

-<추격자>에서 살인마 지영민(하정우)의 피해자인 미진,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 섬마을 주민들의 묵인 아래 학대와 착취로 병든 인물 복남처럼 압도적인 컨셉과 배우의 호연이 만나 필모그래피에서 유독 돋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각각의 작품들이 배우 서영희의 인생에 작은 분기점으로 기능했나.

서영희_ <추격자>는 내게 연기를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좋은 평가를 안겨줬다. <마돈나>에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만나서 너무 고마운 작품들이다. 간혹 그 세 작품만 주로 이야기해서 섭섭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전혀. 그렇게 회자되는 대표작이 있다는 건 배우로서 행복한 일 아닌가. 비슷한 맥락으로 어두운 역할만 많이 해서 싫지 않냐는 질문도 받는데, 그것도 전혀 싫지 않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인물 하나하나가 무척 다르기 때문에 배우로선 무언가 겹치거나 중복된다는 느낌은 없다.

-<탐정: 리턴즈>(감독 이언희), <마돈나>(감독 신수원) 등 서영희 배우는 지금껏 여성감독들과 작업한 경험이 다수다.

서영희_ 맞다. 시작부터 그랬다. 박찬옥 감독님의 <질투는 나의 힘>(2002)을 시작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 자주 함께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글쎄…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걸까? 약간 편안하게 다가가는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워낙 두루두루 잘 지내는 성격이라 배우들이 여럿 모이는 촬영장에서도 유연하게 잘 적응한다. 특히 <궁녀>는 출연배우가 많아서 김미정 감독님이 촬영장에서 배우들이 편하게 어울려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한 작품인데, 촬영도 무탈했고 배우들과도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이돌에서 믿음직한 배우로 활약하는 인물들의 좋은 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부담감도 클 테고.

손나은_ 격려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개중에는 부정적인 시선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결국은 내게 주어진 기회를 그저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임하는지 보여드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 노력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진심을 다하려 한다. 지금까지 해온 TV드라마처럼, 작은 역에서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올라가고 싶다. 욕심낼 생각은 없고 내 페이스대로 천천히 가고 싶다.

-최근에는 분량이나 역할의 중요도 면에서 여성배우들에게 보다 동등한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관객의 목소리도 선명해지고 있는데.

서영희_ 배우로서 조금 아쉽더라도 마음 편히 기다리자는 입장이다. 무던한 성격을 타고난 것도 있고,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욕심낸다고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갈증이 언젠가 좋은 기회를 만나면 제대로 폭발할 수도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도 <여곡성>은 내게 무척 기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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