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재개봉하는 <페르세폴리스>는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자전적 그래픽노블에 움직임을 부여한 핸드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기에 유년을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유럽으로 이주한 마르잔(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의 성장기는 독특한 ‘액자’에 담겨 있다. 영화는 안정에 도달한 현재의 주인공이 타인에게 들려주는 향수 어린 추억담이 아니라, 여전히 불안과 결핍을 안고 사는 마르잔이 담배를 피우며 빠지는 회상이다. 그의 부모와 할머니는, 젠더 불평등이 만연한 폐쇄 사회에서 딸이 행복할 수 없음을 확인하자, 딸을 변화시키는 대신 떠나보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라며. 그리움에 공항까지 온 마르잔은 차마 테헤란행 티켓을 사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화면에서는 색채가 사라진다. 결말 즈음 영화가 다시 현재로 복귀하면 우리는 마르잔이 파리 공항에서 덧없이 보내는 하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짐작에 이르게 된다.
11/06
<리처드 3세>(1995)로 기억되는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이 연출한 <해피 댄싱>(2017)은, 영국의 노년 명배우들이 종종 “사람이 예술만 하고 살 수는 없지”라는 투로 유유자적한 앙상블을 시전하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2) 계열의 드라마다(<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영국에서 실버영화를 수익성 있는 미니 장르로 만들고 속편을 낳았다). 장기근속한 경찰의 아내로 35년 결혼생활 끝에 ‘레이디’ 작위를 받게 된 산드라(이멜다 스탠턴)는 축하 파티 당일 남편의 외도 사실을 맞닥뜨리고 여전히 청춘의 마인드로 생활하는 독신 언니 비프(실리아 임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어쩔 수 없이 산드라가 말을 섞게 된 언니의 유쾌한 친구 중에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의 병구완을 위해 재산을 처분하고 보트에서 생활하는 수리공 찰리(티모시 스폴)가 있다. 처음에 소 닭 보듯 하는 두 사람의 다음 이야기는 힌트가 없어도 예측 가능하다. <해피 댄싱>의 줄거리를 읽었을 때 노년의 영국인들이 춤으로 잃어버린 생기를 찾고 피날레로는 이탈리아 여행을 가는 익숙한 영화려니 짐작했고, 실상도 그런 영화였다. 다만 10년 전이나 15년 전의 나라면 귓등으로 넘겼을 대사와 일화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내가 삶에서 서 있는 자리가 변했고, 고령화 추세에 맞춰 소위 실버영화가 늘어나면서 세부가 풍부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해피 댄싱>의 인물들은 젊은이와 친구가 된다거나 젊음을 회복해서가 아니라 노년으로서 행복하다. “앞으로도 계속 배에서 살 건가요?”라는 산드라의 질문에 찰리는 “아뇨. 때가 되면 더 큰 모험을 해야죠”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모험의 내용은 세계일주가 아니라 지금의 배를 몰고 영국 해협을 건너 맛있는 프랑스 빵을 먹는 것이다. 인물들이 활동하는 댄스 클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길거리 플래시 몹을 벌여 모금을 하는데 목표는 빈곤층 노인의 난방비 지원이다. 대사대로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의 시절은 지났잖아?” “늙어서 좋은 게 뭔데? 창피한 것이 없어지는 거야.” 뻔뻔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라 불필요한 체면치레 때문에 못했던 재밌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영화 종장에 이탈리아 비엔날레의 큐레이터가 그들을 로마로 초청하는 것도, 춤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노년의 그들을 춤추게 하는 욕망과 에너지가 예술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다수 주류영화들이 인생 최초의 결혼, 소원 성취, 모험을 다뤄왔다. 영화가 미디어 지형도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달라지면서, 타자의 눈으로 노년을 정의하는 대신 여태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두 번째, 세 번째의 경험들이 행동 주체의 눈으로 그려지는 대중영화가 늘어나는 현상도 불가피할 것이다.
11/07
<페르세폴리스>의 주인공인 이란 여성 마르잔 사트라피는 <와즈다>(2012)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소녀의 먼 자매다. 마르잔의 부모는,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에서 딸의 미래를 위해 유럽에서 교육시키고자 하는 젊은 엄마의 선배다. 테헤란 좌파 지식인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 마르잔은 예언자가 장래희망이고 이소룡이 역할모델이다. 팔레비 국왕이 축출된 이슬람 혁명 초반, 8살 마르잔은 부모가 친구들과 정치를 걱정하는 자리에서 쿵후 시범을 보이고 “왕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논다. 그래도 유물론자는 아니어서 꽤나 종교적인데, 소녀의 종교는 율법과는 무관하니 스스로 예언자/교주를 꿈꾸고 신을 상상의 친구로 삼는 방식의 신앙이다. <페르세폴리스>는 부모를 선망하거나 증오하며 성장하는 스토리가 아니다. 주인공에게는 이란 사회라는 더 막강한 적이 있다. 마르잔의 가족은 곧 마르잔의 됨됨이고 숙명이다. 진보적인 부모는 출소한 친구가 고문 경험을 상세히 들려주는 자리에도 딸을 동석시킨다. 팔레비 국왕 퇴출로 새로운 이란을 낙관했던 사회주의자 삼촌이 이슬람 혁명 정권에 의해 다시 투옥되자, 마르잔의 부모는 딸이 처형을 앞둔 삼촌을 혼자 면회하도록 허락한다. 대부분의 또래들이 모르고 자라는 일들이 마르잔에게는 일상의 일부인 것이다. 뒷날 마르잔이 결혼을 결심하자 어머니(카트린 드뇌브)는 기뻐하기는커녕 20대 초반에 결혼을 택한 딸에게 실망을 표한다. 오래지 않아 마르잔이 이혼을 고민하자 할머니(다니엘 다리외)는 한술 더 뜬다. “난 또 누가 죽었다고. 고작 이혼 가지고 그랬니? 심장병 있는 거 알면서 왜 놀라게 하고 그러니?” 하지만 이 가족에게 감탄한 대목은 따로 있다. 부모의 배려로 빈의 고등학교로 유학했던 마르잔은 부적응과 실연으로 심신이 상해 불명예스럽게 귀향하는데, 이때 어른들은 마르잔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 가족의 정치적 성향보다,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건 지켜보며 필요한 지지를 보내는 인내가 인상적이다. <페르세폴리스>는 1978년 이후 이란 정치사를 시민의 관점에서 생생히 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서구화를 경계하며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기본권까지 도외시하는 이슬람 정권이 끼치는 폐해는 권력의 직접적 억압 이상이다. 공포정치의 결과 시민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한다.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은, 정권에 대한 순종을 전사한 애국자들에게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세뇌시킨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일종의 ‘보상’으로 대상화되고 여성 혐오는 깊어진다. 검거된 반정부적 인사 가운데 처녀인 여성은 율법에 끼워맞추기 위해 처형 전에 강제결혼, 즉 성폭행당한다.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이 자전적 영화의 연출자로서 갖춘 강력한 미덕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중 마르잔은 양성 분리와 성차별에 강력히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여성 혐오적 통념을 이용하기도 한다. 10대시절 헤비메탈 음반을 사다가 적발되자 계모가 악독하다고 동정을 호소하고, 풍기단속을 당했을 때는 연약한 여자 이미지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한다. 이쯤해서 왜 영화의 제목이 이란의 수도를 이르는 고대 그리스식 명칭 ‘페르세폴리스’인지 반문할 만하다. 간단히 말해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강요하는 규범은 마르잔의 가족을 포함한 진보적 이란인들이 보기에 진정한 이란의 전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마르잔에게 잊지 말라고 강조하는 정체성은, ‘페르세폴리스’라는 옛 이름이 대변하는, 정치적으로 수천년 동안 외세에 시달리면서도 유지된 페르시아 고유의 언어와 문화다.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의 양식적 매력은 이를테면 고딕체의 그것이다. 담백하고 통렬하며, 감상(感傷)이 없고 위트가 넘친다. 흑백 모노크롬으로 그려진 인물과 배경은 장식적으로 추상화되어 주인공의 관점을 직접 반영한다. 예컨대 마르잔의 복장을 단속하는 차도르 쓴 어른들은 ‘가오나시’를 연상시키고 테헤란과 빈의 거리 풍경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세트가 그렇듯 주인공의 마음을 반영한다. 한편 마르잔의 이목구비는 아동화처럼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심신의 상태를 꼼꼼히 반영해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 <페르세폴리스>의 검정은 내가 영화에서 본 가장 검은 검정이다. 살해된 이웃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웅덩이, 정권을 수호하는 유사 경찰들의 덥수룩한 수염, 겁에 질린 여자들의 히잡을 깜깜하게 칠한 검정은 그대로 심연이다. <페르세폴리스>의 흑백이 내는 또 다른 효과는 비밀스러움이다. 96분 동안 나는 이불을 쓰고 금지된 팸플릿을 손전등으로 읽는 동조자의 기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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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노 다다노부
<친애하는 우리 아이>(2017)의 다나카 마코토(아사노 다다노부)는 말하자면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꼭꼭 채우는 남자다. 이 40대 재혼남 샐러리맨은 항상 옷매무새가 단정하고 퇴근 후엔 빵집이나 장난감 가게에 들렀다 집으로 직행한다. 잠들기 전에는 꼼꼼한 치실질도 빠뜨리지 않는다. 다나카는 <카페 뤼미에르>(2003), <새드 배케이션>(2007), <토르: 천둥의 신>(2011) 등에서 아사노 다다노부가 그려온 포니테일의 자유로운 영혼이나 고독한 ‘사무라이’들과는 평생 겸상할 일이 없을 캐릭터다. 아사노 다다노부의 연기는 20년쯤 물류 회사에 근속해온 듯 감쪽같다. 좋은 아버지 되기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다나카는 한번 정한 이상(理想)을 위해 작은 타협을 불사할 태세가 된 사람이다. 그래서 직장과 가정에서 시험에 직면할 때마다 먼저 인내하고 몸동작을 작게 하며 신중을 기한다. 회사에서 모욕받고 의붓딸에게 비난받는 장면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떠오른 예의바른 미소 뒤에서 정답을 고르는 남자를 목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