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서울은 공사 중
2018-11-14
글 : 윤가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마이자 (일러스트레이션)

지난 10월, 손등에 올라온 발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조금 겁을 먹고 병원을 찾았다.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대상포진을 걱정하며 호들갑을 떨던 나를 진정시키면서 그저 접촉성 피부염일 뿐이라고 약을 바르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며 웃어 보였다. 지난 몇주간 만진 거라곤 노트북과 외장하드 밖에 없는데 대체 어디에서 무엇에 감염된 건지 알 수 없던 나는 다시 한번 오랜 피로 누적을 들먹이며 대상포진 의심을 시도했다. 하지만 인내심까지 많은 상냥한 선생님은 손을 너무 자주 씻거나 심한 미세먼지에 노출되는 등 다양한 요소가 원인이 될 수 있다며 혹시 출퇴근길에 공사 중인 곳이 있냐고 물었다. 생각해보니 편집실 근처에 두개의 큰 빌딩이 한참 올라가는 중이었고, 며칠 전부터는 하수도 공사까지 시작해 가까운 길을 두고 한참을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버스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는 도중에도 신축 빌라와 상점들이 생겨나고 있었네. 정류장 앞도 무슨 일인지 잔뜩 파헤쳐지고 있었고. 가만있자, 정작 바로 집 앞에 정체불명의 건물이 1년째 올라가고 있었잖아! 사실상 집과 일터를 잇는 모든 길목이 공사 중이었던 것이다. 매일 초미세먼지 구덩이를 오가는 답답함에 셀 수 없이 자주 씻는 버릇을 들였던 나는 피부염을 유발하는 모든 원인을 완벽하게 마스터한 환자로서 민망한 미소만 남긴 채 얌전히 처방전을 받아들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피부염은 약을 바르고 이틀째 되는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공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또 매일 새로운 공사장까지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공사 이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분명 지난해에도 공사 중이었는데 왜 또다시 공사를 하고 있는지 알쏭달쏭한 곳들도 있었다. 눈에 익기도 전에 사라지는 풍경들이 이렇게나 많아졌다니, 오랜만에 좀 새롭게 서글퍼졌다. 물론 노후하고 불편한 공간들을 안전하고 쾌적하게 바꾸려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정말 이 모든 개발이 절실하고 필수적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반도 다 쓰지 않은 지우개를 유행이 지났다고, 손에 쥐는 느낌이 예전만 못하다고, 친구들이 모두 새 지우개를 쓰기 시작했다고 그대로 내버리고 자꾸만 새로 사서 쓰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재건축을 앞두고 이주가 거의 마무리된 개포주공단지의 소식을 듣게 돼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한번도 산 적 없는 그 오래된 저층 아파트 단지는 내겐 십수년 전 먼저 개발로 사라진 내 고향의 풍경을 제법 비슷하게 재현해주던 유일무이한 장소였다. 가끔 생각이 많아질 때면 몰래 그곳을 찾아가 주민인 척 거닐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유년의 단순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곤 했는데, 이제 그럴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살아온 공간들을 계속해서 잃는 경험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걸까. 이미 여러 번 겪은 과정이지만 오랜 시간 나와 함께 버텨온 풍경들을 떠나보내는 일은 참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대리고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2018)의 개봉이 진심으로 반갑고 고마웠던 이유도 이런 서울 실향민으로서의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온 삶의 소중한 동반자로서의 집을 오랜만에 바라본다. 고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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