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 고 신성일을 기리며
2018-11-15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사진 : 최성열
무비스타 신성일과 그의 시대

한국영화의 큰 별 신성일이 향년 81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영화 인생을 기념하는 회고전과 특별 전시가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올해 10월 역시 예의 세련되고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영화제를 방문했던 그의 모습을 보았기에 지난 11월 4일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은 영화인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 그는 지난해 6월부터 폐암 말기의 투병 생활을 견뎌오고 있었다. 한국 미남의 대명사였고,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타였지만 결국 한 인간으로서 병마를 이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국영화, 아니 한국의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넓혀 보아도, 신성일(申星一) 만큼 ‘별’(星)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완벽한 이력과 최고 수준의 행보를 보인 이가 있을까. 그는 1960년대 초반 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뒤 1970년대까지 20년 동안 최고 스타의 자리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객관적 수치로도 증명되는데, 1960년대 그의 한해 출연작은 무려 50편에 육박했다. 당시 충무로에서 일주일에 한편씩 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스타배우로서 그의 성공은 출연료의 세금 납부로도 증명된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그의 납세액은 영화배우 중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구적인 외모를 타고난 청년은 스타가 되기를 절실하게 갈망했고 이를 알아본 영화계는 주저 없이 그를 대중 앞에 내세웠으며 열광한 대중은 기꺼이 그를 스타의 신전으로 올렸다. 제작 시스템을 갖춰가던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할리우드식의 스타 시스템이 모색되고 안착된 것은 바로 신성일 덕분이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왕좌를 차지하고 양적, 질적 성장으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 것 역시 배우 신성일이라는 존재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의 그 역시 ‘무비스타’라는 명칭 자체를 사랑한다며 영화에서 스타의 역할과 의미를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무엇보다 영화는 일반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하는 ‘무비’(Movie)이어야 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 역시 스타배우이기 때문이다.

<만추>

불우한 청년, 영화배우가 되다

신성일은 1937년 5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본명은 강신영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잃은 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막내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도청공무원이었지만 박봉으로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매사에 엄격한 어머니였지만 막내아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그 역시 모범적인 생활로 보답했다. 학창 시절의 그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자존심, 만능, 감수성’인 듯하다. 그의 자존심은 ‘잘생긴 아이’로 알아주는 주변의 관심과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듣도록 행동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 어머니 덕에 형성된 것이었다. 너덜너덜 기운 양말이 싫어서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았을 정도로 자존심이 셌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그는 당시 가장 명문이었던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으며, 고전음악 감상실과 프랑스 예술영화를 상영하던 재개봉관에서 진을 치며 문화와 예술을 섭렵하던 감수성 넘치는 소년이기도 했다. 학교 선배들처럼 명문대학교의 법대나 의대로 진학해 대한민국 최고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집안의 한 사건으로 물거품이 된다. 그 시절 동네마다 흔히 일어나던 계모임이 깨진 일 때문에 계주였던 어머니가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한창 공부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빚쟁이들에 시달리다 서울의 판잣집으로 이사 온 그는 서울대 입시에 두 차례 낙방했고 이후 호떡 장사까지 하며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어떤 분야든 대한민국 최고가 되겠다던 그의 다짐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기회를 맞는다. 잘생겼다는 소리는 지겹게 들어온 그였기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하며 충무로 거리를 걷다 운명처럼 ‘한국배우전문학원’이라는 간판을 발견한 것이다. 그길로 학원에 들어가 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때가 1959년 4월경이었다. 그해 7월 신필름 신인배우 모집에 응모한 그는 3천 대 1이 넘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된다. 사실은 인산인해가 된 접수 행렬에 밀려 있던 그를 지나가던 이형표 감독이 눈여겨보고, 다방으로 불러 추천 쪽지를 써준 결과였다. 쪽지를 들고 접수장을 통과한 그는 신상옥 감독, 최은희 배우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내일부터 사무실에 나오라는 신 감독의 말을 듣게 된다. 배우학원에 등록한 지 3개월여 만에 영화사의 신입 사원으로 영화 일을 시작하는 행운을 만난 것이다. ‘신성일’이라는 예명은 바로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것이었다. “뉴(新) 스타(星) 넘버원(一)”이라는 뜻에 신상옥의 성인 신(申)을 붙여주었다. 그의 데뷔작은 <로맨스 빠빠>(감독 신상옥, 1960)였다. 고등학생인 막내아들 역으로 얼굴을 알리며 스타로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청춘영화 스타로 등극하다

신필름에서의 3년 동안 신성일은 사무실의 전화 받는 일부터 주연배우까지 맡으며 영화제작의 전반적인 과정을 익힐 수 있었다. 신필름과의 전속계약이 끝난 1962년 그는, 신상옥이 그의 스타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이, 또 하나의 제작명가인 극동흥업으로 옮기며 스타덤에 오르는 계기를 맞는다. 또 하나의 기회이자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훗날 <만추>(감독 이만희, 1966)를 제작한 호현찬이 기획한 멜로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감독 유현목, 1962)에서 그는, 미망인 바 마담과 사랑에 빠지는 청년 역을 제대로 소화해 언론의 찬사를 받는다.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찾은 덕분이었고, 그해 신인상과 인기상을 석권하는 행운까지 누린다. 그는 연극 무대에서 출발한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등의 선배 배우들과 달리 처음부터 스크린 배우로 출발한 최초 세대이다. 서구적인 얼굴과 비율 좋은 몸 역시 그만의 기반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3년 그는 <가정교사>(감독 김기덕), <청춘교실>(감독 김수용), <성난 능금>(감독 김묵)으로 이어지는 ‘청춘영화’에서 반항아라는 적역을 맡으며 그만의 진가를 발휘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 된 <맨발의 청춘>(감독 김기덕)이 1964년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일거에 톱스타의 자리로 올라선다. 이 영화로 신성일·엄앵란의 스타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이른바 ‘신·엄 콤비’는 그해 무려 26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것으로 청춘 관객의 열광적인 지지에 응답한다. 또 같은 해 11월 14일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은 온 국민이 주목하는 이벤트로 치러지며 언론 지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사실 1960년대 초·중반에 크게 유행한 한국의 청춘영화는 일본영화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번역하거나 참조해 극본을 만든 후, 감독의 연출 과정에서 한국적 상황으로 바꿔가며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원작인 <진흙투성이의 순정>(泥だらけの純情, 1963)과 모방작인 <맨발의 청춘>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불량하면서도 로맨틱한 건달 두수를 연기한 신성일 덕분이었다. 그렇게 신성일은 <이유없는 반항>(1955)의 제임스 딘과 <그 녀석과 나>(あいつと私, 1961)의 이시하라 유지로와는 결이 다른 한국 청춘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는 반항아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정진우 감독이 연출한 멜로드라마 <배신>(1964), <초우>(1966), <초연>(1966) 등이 이어지며 1960년대 내내 그의 스타성은 소멸되지 않았다. 이는 1963년 청룡영화상 인기남우상을 받은 그가 이후 10년 연속으로 같은 상을 받은 것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맨발의 청춘>

스타에서 배우로 그리고 중년의 얼굴로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문예영화’라는 제도이자 장르를 통해 서구 모더니즘 영화를 염두에 둔 미학적인 실험을 모색하기 시작했을 때, 바로 거기 스타배우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신성일의 이미지가 활용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유현목의 <춘몽>(1965), 김수용의 <안개>(1967)와 <까치소리>(1967), 이성구의 <일월>(1967)과 <장군의 수염>(1968),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1968) 등을 통해 그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아마도 감독들은 신성일의 얼굴이 만들어내는 허무와 우울, 냉소와 절망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장해가던 그는, 후시녹음 시대 유일하게 자기의 목소리로 녹음한 <이상의 날개>로 처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생전의 신성일이 늘 얘기했던 것처럼 그의 최고의 파트너는 이만희 감독이었다. 그가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깨닫게 된 것도 바로 이만희를 만나고서부터다. 그는 1965년 <흑맥>을 시작으로 <군번없는 용사>(1966), <만추>(1966), <원점>(1967), <망각>(1967), <휴일>(1968) 등으로 작업을 이어가며 이만희의 페르소나로 분했다. 신성일이 그의 영화 인생 최고의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만추>를 꼽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대사는 아끼고 영상과 분위기를 앞세운 이 영화에 그동안 단련된 그의 연기가 모두 함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현재 우리는 <만추> 속 신성일을 볼 수 없지만, 2005년 뒤늦게 발굴되어 37년 만에 공개된 <휴일>을 통해서나마 그 연기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만희의 분신일 영화 속 그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스산한 표정과 몸짓으로 그려낸다. 어쩌면 <휴일>의 신성일은 스크린에 투영된 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시기의 흥미로운 사건으로 1967년 하길종, 김지하, 김승옥 등이 주도한 서울대 영화페스티벌에서 그를 ‘최악우(最惡優) 연기상’으로 선정한 것을 들 수 있다. 호기롭게 그는 직접 수상하고 이후에도 상을 간직했다고 하는데, 이는 스타로서의 자존감과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 한국영화는 침체 일로를 걷게 되는데, 그나마 영화산업을 유지하게 만든 것이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였다. 이 시기 신성일은 1970년 <결혼 교실>(감독 정인엽)을 마지막으로 미남 청년으로서의 이미지는 모두 소진하고, 현재적 의미의 미중년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그 출발점에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별들의 고향>(감독 이장호, 1974)이 있었다. 단관 개봉 시절 무려 46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1위에 오른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청춘스타에서 중후한 중년 남성으로 캐릭터 전환에 성공한다. 그가 만들어낸 로맨틱한 중년 이미지는 특히 <태양 닮은 소녀>(감독 이만희, 1975), <왕십리>(감독 임권택, 1976), <겨울여자>(감독 김호선, 1977), <속 별들의 고향>(감독 하길종, 1978)에서 빛을 발한다. 1980년에도 그는 <장남>(감독 이두용, 1985), <길소뜸>(감독 임권택, 1985) 등에서 영화사에 기록될 연기를 남겼고, 1987년 <달빛 사냥꾼>(감독 장길수), <레테의 연가>(감독 장길수), <위기의 여자>(감독 정지영) 등을 통해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그는 유작이 된 <야관문: 욕망의 꽃>(2013)까지 무려 513편의 영화 출연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주연작이었다. 안타깝지만 이제 우리는 ‘무비스타’ 신성일을 한국영화의 신전으로 보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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