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가타부치 스나오 / 목소리 출연 노넨 레나, 호소야 요시마사 / 제작연도 2016년
2014년 곤 사토시의 미완성작 <꿈꾸는 기계>에 꽂혀 있던 나는 제작사 매드하우스와 연락하던 중 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마루야마 마사오 프로듀서가 <꿈꾸는 기계>를 미뤄둔 채 마파(MAPPA) 스튜디오를 설립해 창립 작품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의 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것. 제목은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감독은 <마이 마이 신코 이야기>(2009)의 가타부치 스나오. 그 후 3년이 지나고 2016년 10월 공개한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제19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에 소개되었고,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올해 가타부치 스나오 감독은 BIAF 포스터와 트레일러를 연출하는 한편 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마키 다로 프로듀서는 곤 사토시 특별전으로 다시 방한했다.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정말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소중한 인연을 맺어준 작품으로 기억하고 싶다.
히로시마에 살고 있는 소녀 스즈(노넨 레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18살이 되어 혼기가 찬 스즈는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이웃 마을 구레에 사는 슈사쿠(호소야 요시마사)와 결혼한다. 스즈가 구레의 삶에 적응해갈 무렵, 군항 구레에는 태평양전쟁의 그늘이 드리우고 스즈의 안온한 삶은 전쟁의 여파로 무너져간다. 전쟁은 스즈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앗아가지만, 일상을 지키려는 스즈의 노력은 끝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주인공 스즈의 삶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일상을 처연한 서정으로 묘사한다. 스즈 목소리를 연기한 노넨 레나는 당시 소속사 분쟁으로 영화와 방송에서 출연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으나 가타부치 감독이 노넨 레나가 꼭 스즈여야 한다고 제작위원회를 설득하는 데 성공, 이 영화를 통해 노넨 레나는 완벽한 스즈로 재탄생한다. 일을 쉬면서도 틈틈이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던 노넨 레나는 어딘가 스즈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절정은 불발한 시한폭탄으로 조카 하루미의 죽음과 함께 스즈의 잃어버린 오른팔을 묘사한 암전과 물감의 색채가 교차하는 적막이 흐르는 순간이다. 가타부치 감독은 여기에서 죽음과 구원의 상징으로 형식의 프레임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태극기가 게양되고, 스즈가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사실 지금까지 다른 나라를 침략해온 가해자였다는 것을 반성적으로 밝혀낸다. 마지막 장면, 스즈가 슈사쿠와 함께 다리 중간에서 “이 세상의 한구석에서 나를 발견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할 때 영화가 지향하는 감성이 잘 드러난다. 또한 ‘코트링고’가 맡은 사운드트랙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이 세상의 한구석에>의 정서를 한층 강화한다. 전쟁의 끝, 폐허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지속된다.
참고로 <이 세상의 한구석에>는 2018년 11월 13일 기준, 일본에서 732일간 극장에서 장기 상영하고 있으며 내년 봄에는 유곽에서 일하는 린과 슈사쿠의 일화를 살려내어 30분 늘어난 <감독판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개봉을 준비 중이다.
김성일 프로그래머. 2009년부터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수석프로그래머를 맡아 전세계의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