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박해일이 시를 읊는다. 중국에서 어린이라면 누구나 읊을 줄 안다는 낙빈왕의 <영아>(咏鹅)라는 시를 말이다.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다. 장률 감독이 평소 박해일의 아이 같은 면모를 떠올린 이미지인데 그것이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 영화는 박해일이 맡은 윤영이, 송현(문소리)이 선배(윤제문)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송현과 함께 군산으로 여행 가면서 시작된다. <경주>(2014), <필름시대사랑>(2015)에 이어 장률 감독과 세 번째 작업한 이 영화는 박해일에게 어떤 여행이었을까. 현재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를 촬영하고 있는 그는 비니로 민머리를 감춘 채 인터뷰 장소에 들어왔다.
-18개월 된 둘째아이는 잘 크고 있나.
=영화 <나랏말싸미> 촬영 때문에 집을 나와 있어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다.
-둘째라 육아가 첫째에 비해 수월한 점도 있나.
=꼭 그렇지도 않다. 첫 작품은 멋모르고 낳았다. 두 번째 작품은 잘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낳고 나니 더 어렵다.
-민머리가 낯설다. (웃음)
=사람을 만날 때 챙이 있는 캡모자를 쓰는 건 실례인 것 같았다.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비니를 쓴 채 입장한 것도 그래서다.
-배역 때문에 머리카락을 민 건 처음인가.
=그렇다. 연극할 시절 가장 짧았던 머리카락 길이가 스포츠형이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원래 목포에서 찍을 계획이었다고 들었다.
=장률 감독님과 다음 작품 얘기를 나누는데 대학 강의 때문에 목포를 갔다온 적 있다고 하셨다. 나도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그곳에 다녀온 적 있고, 무척 인상적인 도시였다고 말씀드렸다. 그 얘기를 들은 감독님이 같이 가자고 제안하셔서 장소를 헌팅하기 위해 1박2일 일정으로 목포에 내려갔다.
-장률 감독과 목포 얘기를 나누기 전에 목포에 왜 갔나.
=인사동에서 지인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목포 얘기가 나와서 내친김에 서울역으로 가 KTX 목포행 막차를 탔다. 그곳에 자정 넘어 도착해 밤바다를 구경하고 갑오징어를 안주 삼아 술 한잔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목포 기행을 했다. 목포역 뒤편 몇 킬로미터 반경 안을 걸었다. 홍어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목포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에 가서 직접 담근 막걸리와 함께 먹었다. 그렇게 사는 얘기를 나누다가 서울에 올라왔다.
-장률 감독과 함께 군산을 다녀온 건 전작 <경주>를 준비할 때 경주를 다녀온 것과 어떤 차이가 있나.
=장률 감독님과 처음 작업한 <경주>는 낯선 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각자 취향도 관심사도 달라 목적지에 가면 일어날 법한 일들을 상상하면서 짐작하게 된다. 반대로 여행을 함께 갔다온 사람과 새로운 목적지(군산)로 가는 느낌은 또 달랐다.
-장률 감독은 이 영화가 “성인이 술에 취해 시를 읊는 이미지가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떠올랐다. 마음은 아이인 박해일이 낙빈왕이 쓴 시 <영아>를 읽으면 재미있겠다 싶어 출발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렇게 자세한 얘기를 듣진 못했고, 시 하나를 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게 영화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알지 못했다. 중국 어린이 누구나 말을 배우기 위해 배운다는 그 시는 내가 아닌 다른 성인이 읽어도 독특한 느낌을 낼 거다.
-중국 시를 읊어야 한다는 설정이 난감했을 것 같다.
=현장에서는 난감한데 막상 시를 읊고 나면 이상한 희열감이 느껴진다. 잘한 건가 싶기도 하고.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게 장률 감독님의 영화인 것 같다.
-윤영은 어린 시절 화교학교를 다녔고, 한때 시를 쓰려고 했던 사람이다. 이 설정 때문에 전작 <경주>에서 연기한 최현이 떠오르기도 했다(<경주>의 최현은 베이징대학 정치학과 교수다.-편집자).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최현의 또 다른 여행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어디에서 어디로 간다, 어디에서 온 사람이다, 과거의 기억을 좇는다 같은 설정을 보면 두 작품이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두 작품 모두 출연한 사람으로서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제각기 달랐던 것은 경주는 혼자, 군산은 송현이라는 여자와 둘이서 여행을 간다는 사실이다. 둘이서 하는 여행의 경우, 같은 공간이라도 각기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되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도 혼자 가는 것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혼자 여행하는 것보다 더 복합적이다.
-송현을 연기한 배우 문소리와는 꽤 많은 작품을 한 것 같은데 이번 영화가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작업이다.
=문소리씨와 몇 작품째냐고 물어보신 분도 있다.(웃음) 연극하던 시절, 문소리씨가 출연했던 영화 <박하사탕>(1999)이 개봉했었는데 극단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그가 온 적 있다. 박하사탕 향이 날 것 같은 옷을 입었던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후 임순례 감독님과 함께 만난 적이 있고… 여러 자리에서 뵐 때마다 “술자리에서 그만 만나고 작품을 같이하자”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눴었다. (웃음)
-송현에게 함께 군산으로 여행 가자고 제안한 윤영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보았나.
=송현이 결혼하기 전에 송현에 대한 감정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윤영이 송현과 함께 군산에 내려가는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송현과 술을 마시다가 툭 던진 얘기니까. 아마도 송현도 그 순간 윤영과 함께 군산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으니까.
-윤영은 자신의 집에서 일을 하는 조선족 출신 가정부에 관심을 없다가 그녀가 윤동주 시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이중적인 면모도 보이는데.
=현장에서는 윤영이 복합적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또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계산할 생각도 없었다. 그걸 의도했다면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저 그 순간의 공기, 감정의 환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민박집 시퀀스는 민박집 주인의 딸 주은(박소담)과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곳은 게스트하우스로, 촬영이 끝난 뒤 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 그 공간을 보았을 때는 미로 같았다. 감독님이 그런 느낌의 공간을 찾으셨던 것 같고, 미로 같았기에 주은과의 인물 배치가 숨바꼭질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송현과 술 마시는 영화의 후반부, 윤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흥이 오른 채 시 <영아>를 읊는 장면은 재미있더라.
=촬영하기 전 그 시를 처음 들었을 때 거위를 묘사하는 시의 내용과 뜻이 깊게 다가왔다. 촬영 전 감독님이 술을 마실 때 나는 흥으로 시를 읊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하셨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동작까지 해보이니 감독님이 재미있어 하셨다.
-술 마시다가 중국 시를 읊는 건 아무래도 낯선 광경이다.
=누가 술을 마시다가 시를 읊나. (웃음) 인사동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도 한국 시를 읊지 않는데.
-윤영, 송현, 송현의 전남편, 세명이 함께 술을 마시는 시퀀스가 그 뒤에 이어지는데 연기 선수들 덕분에 내내 웃음이 터졌다.
=촬영 전, 이도 저도 아닌 장면이 나오거나 독특한 공기와 상황이 카메라에 잘 담기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거라고 보았다. 찍기 전부터 이 시퀀스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안 와서 되게 답답하고 힘들었다. 어떻게 찍었는지 모르고 찍은 유일한 신이었다. 그만큼 부담감이 컸다.
-이 영화는 <경주> <필름시대사랑>에 이어 장률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이다. 그만큼 장률 감독과 통하고 결과물에 만족하나보다.
=감독님이 배우로서 나의 한계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게 부담을 덜 주는 방식으로 작품을 하자고 제안해오면 해볼 만한 게 있고, 호기심도 생기며, 길을 함께 찾아가면서 작업한다. 힘들겠다 싶은 걸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감독님이 해결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끌어주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감독님이 “어디 여행을 한번 가볼까?”라는 말로 작업을 제안하셨는데 그런 표현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 <경주>가 반가웠던 건 감독님이 이야기를 확장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실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들었고, 그 기대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경주> 이전에 장률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풍경에 가까워 보였다면, 박해일은 서사에 독특한 리듬과 호흡을 부여하는 인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장률 감독님의 이야기에 들어가서 그런 리듬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상업영화나 장르영화를 작업할 때 해당 영화의 서사에 적합한 호흡에 맞추다보니 장르영화 속 캐릭터 패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몸에 맞는 호흡이나 리듬은 장률 감독의 영화와 장르영화 중에서 어느 쪽인가.
=두 가지가 적절하게 섞이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건 어렵고 무의미하다.
-어쨌거나 배우를 끔찍이 생각하는 감독이 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이야기에서 공간도 중요하지만 배우 입장에선 이야기와 캐릭터가 무엇인가가 먼저 궁금한 게 사실이다. 감독님은 내가 기존에 해보지 않았던 길을 찾아가게 해주신 것 같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나보다.
=아직 40대 초반이다. (휴대폰을 꺼내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2003) 때 찍어준 자신의 앳된 사진을 보여주며) 15년 전에는 이렇게 어렸다. (웃음) 나이가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는 시기도, 바람 부는 돛단배에 앉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기도 있는 거다.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두 시기 모두 가지고 가려고 애쓰고 있다
-차기작 얘기도 해보자. <나랏말싸미>에서 맡은 신미 스님은 어떤 역할인가.
=송강호 선배가 연기하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심혈을 기울여 돕던 인물 중 한명이다. 역사에서 정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다. 스님이라 주로 절에서 찍고 있고, 전체 분량 중 절반도 못 찍었다.
-이전에도 스님 역할을 맡은 적 있나.
=<인류멸망보고서>(2011) 중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천상의 피조물>에서 로봇 스님을 맡은 적 있는데 목소리로만 출연했다(이 영화는 2050년 천상사의 가이드 로봇인 인명 스님이 인간 스님들과 함께 설법을 전하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야기다.-편집자).
-송강호와의 작업은 <괴물> 이후 12년 만인데.
=선배가 간 길을 따라가고 있는 입장에서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묘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길을 먼저 열어준 분이라 오래오래 그 길을 걸어가셨으면 좋겠고, 그 덕을 보고 싶은 동시에 나 또한 선배가 보여준 만큼 열심히 뒤따라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