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안타까운 소식들이 연달아 전해지는 와중에 <남과 여>(1966), <빗속의 방문객>(1969), <러브 스토리>(1970), <엠마뉴엘>(1974),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1981), <마이 뉴 파트너>(1984), <내겐 너무 이쁜 당신>(1989) 등의 음악을 맡았던 영화음악 작곡가 프랑시스 레이가 지난 11월 7일 향년 86살로 세상을 떠났다. 미셸 르그랑과 함께 프랑스의 영화음악을 대표해온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에 평생을 함께해온 영화적 동지인 클로드 를루슈는 추모의 글을 SNS에 올렸다. “프랑시스 레이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함께 35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50년이상 함께 멋진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는 프랑스 최고의 위대한 멜로디스트였다. 그에게 감사한다.”
<러브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 눈싸움하는 명장면은 아직도 귓가에 아련한 그 유명한 테마곡이 아니라면 완성될 수 있었을까? 영화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된 사운드트랙이 있다면 <러브 스토리>가 먼저 떠오른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정에 호소하는 듯한 피아노 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주제곡의 선율…. 누군가는 통속적이고 뻔하다고 폄하할지 몰라도, 사실 작곡하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안다. 뻔한 화성과 선율을 써내는 것이 설령 쉽다고 할지라도, 그 뻔함을 가지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눈물을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 피아노를 좀 쳤다 하는 사람이라면 난이도가 아주 높지는 않으니 누구라도 한번쯤 건반 앞에 앉아 이 곡을 따라 쳐보았을 거다.
음악이 먼저 완성된 영화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 레퍼토리인 존 노이마이어의 걸작 <카멜리아 레이디>가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원작 소설인 <동백꽃 아가씨>에 바탕을 둔 스토리가 쇼팽의 피아노 선율에 맞춰 눈부시게 펼쳐진다. 대사 한마디 없는 이 드라마 발레가 어찌나 강렬한지 모두가 눈물을 훔치느라 객석에서 항상 흐느낌이 들려오는 작품이다. 같은 원작을 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19세기를 사로잡았다면 20세기 들어 이 발레 작품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모두의 심금을 울린다.
이 작품의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에투알(파리 오페라 발레의 최상급 무용수를 지칭하는 등급)이었던 발레리노 에르베모로는 4살 때 우연히 본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만든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를 보고 평생 발레를 하겠다고 결심했고 다음해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에투알이 되어 파리 오페라 발레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배우 못지않은 연기력 덕분에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언제나 만석이었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나오는 누레예프에게서 영감을 받은 인물을 연기한 조르주 동이 마지막에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한 볼레로를 추는 장면은 영화의 최고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생을 두고 추구해야 하는 꿈을 결정할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다. 겨우 4살이었던 모로에게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음악이 어쩌면 마법의 주문처럼 그에게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는 프랑시스 레이가 미셸 르그랑과 작업하며 음악을 먼저 다 작곡한 뒤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촬영한 장면을 더해 비로소 완성된 영화다.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말한 것처럼 프랑시스 레이가 아니었더라면,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가정법을 더 해본다. 만약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4살이던 에르베 모로가 발레를 하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오페라 발레에서 배우보다 더 진한 감정을 몸짓으로 전달하는 에투알 에르베 모로의 춤을 20대 초반의 내가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춤으로 <오네긴>과 <카멜리아 레이디>를 접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좀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무대에서 접했던 그 강렬한 감정들, 그로 인한 감정의 정화 작용과 삶을 얼마쯤 견디게 해주던 위로는 오로지 그의 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준비해간 휴지를 다 쓰고도 모자라 얼굴 전체가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다가 옆자리의 관객이 나눠주는 휴지를 받아서 얼굴을 닦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좌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앉아 있어야 했던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인종, 국적, 나이, 성별. 그 모든 차이가 극장의 어둠 속에서 그냥 사라져버리곤 했다. 슬픔에 눈물 짓고,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한 사람만이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오페라와 달리 자막을 볼 필요도 없고 귀를 쫑긋할 필요도 없이 그저 온몸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언어 너머의 몸짓에 깃든 서사를 마주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그 시간만큼은 잠시나마 외국인, 여자, 동양인이라는 특징에서 벗어나 익명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을 그럭저럭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에르베 모로의 춤 덕분이었다.
예술가의 죽음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르 클레지오의 프랑스 TV방송국과의 특별 인터뷰가 있던 날, 방송국 건너편에 살고 있던 나는 운좋게 남은 티켓이 있다는 친구의 연락에 센강을 걸어서 건너갔다. 르 클레지오가 인터뷰 중에 볼레로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자료 화면으로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속 한 장면이 스크린에 등장했다. 스튜디오에 모인 모두가 영화 속 장면에 다시 한번 집중하는 순간, 잠시 불이 꺼지고 모두가 숨죽이며 스크린을 바라보던 얼마쯤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2016년 11월, 류성희 미술감독의 벌컨상 수상식에 수상자로 특별히 참석한 클로드 를루슈 감독에게 수줍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떠오른다. 당시 “최근에 다시 본 <남과 여>는 물론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등 감독님의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라고 했더니,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했느냐 묻고는 내가 짧게 손톱을 자른 손을 내밀며 피아노를 전공했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것은 프랑시스 레이 덕분이라며 “나는 그저 그 음악을 따라가다 보니 영화가 되어 있었을 뿐”이라 했던 이야기가 생생하다.
한 예술가의 죽음을 접하고 이토록 마음이 헛헛하고 슬픔이 밀려오는 것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엇인가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기분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한 소절의 뻔한 멜로디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멜로디가 우리 내면에 와닿아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번지며 내면을 흔들고 지나가면서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고, 춤을 추고, 글을 쓴다. 다시 또 누군가가 그 영화를 보고 춤을 접하고 글을 읽고 그 와중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그래서 이렇게 뭔가를 쓰고 있을 수도 있다. 작곡가는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음악은 더 오래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