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려진 삶
2018-11-28
글 : 김혜리

*<툴리>의 경미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툴리>

회사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는 계획에 없던 셋째 아이를 낳기 직전이다. 자폐 증세가 있는 둘째 조나가 특별한 보살핌을 요하기에 마를로의 만삭은 더욱 힘겹다. 교장 면담의 날,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조나는 엄마가 평소와 다른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고 하자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른다. 첫째도 덩달아 흥분하고 초주검이 된 마를로는 하는 수 없이 꽉 찬 주차장으로 핸들을 돌려 순서를 기다린다. 여기서 <툴리>는 차 안의 소동으로부터 갑자기 외부숏으로 화면을 바꾼다. 마를로의 차가 서 있는 주차장의 전경은 감쪽같이 조용하고 평온하다. 자동차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안쪽에서 벌어지는 생지옥을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처럼 <툴리>는 외부자에겐 알려지기도, 공감받기도 어려운 고통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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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아요. 겉은 멀쩡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컨실러(피부 결점을 덮는 화장품) 범벅이죠.”

<툴리>에서 출산 전후 우울증을 앓는 주인공 마를로가 젊은 야간 보모 툴리(매켄지 데이비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셋째를 낳은 직후 <툴리>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디아블로 코디는 데뷔작부터- 때로는 지나치게- 재치 있는 대사의 달인으로 유명했지만 마를로의 이 한마디에는 재치 이상의 경험적 통찰이 있다. 여자들이 컨실러 범벅인 까닭은, 당연하게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미덕의 가짓수와 기대치가 가혹하게 높기 때문이다. 고발이나 화풀이의 화법과 거리를 두는 이 영화에서 여성이 느끼는 모호한 압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은, 탈진한 마를로가 혼자만의 짧은 휴식을 위해 들른 커피숍에서 연출된다. 당분과 카페인이 절실히 아쉬워 디카페인 저지방 라테를 주문하는 만삭의 마를로에게 지나가던 중년 부인이 슬쩍 조언한다. “디카페인 커피에도 소량의 카페인이 들어 있대요. 그냥 알고나 있으라고요.” 점원이 재차 묻는다. “그래도 드시겠어요?” 원했던 대로 주문을 강행한 마를로는 커피와 머핀보다 두 여자로부터 은근한 비난의 시선을 먼저 받는다. 머핀에 박힌 초콜릿을 힘없이 떼어 먹는 마를로의 커피 브레이크는 기대만큼 즐겁지 않다. 딱히 악역이 없는 <툴리>는, 이처럼 아기를 낳고 주도적으로 키우는 여자들을 둘러싼 근원이 모호한 억압을 짚어내는 탁월한 장면을 여럿 갖고 있다.

극중에서 마를로에게 실제적 도움을 주는 유일한 인물은 부유한 오빠 내외다. 둘째를 낳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동생을 기억하는 오빠 부부는, 모유 수유만 하면 나머지를 전담하는 야간보모를 고용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마를로가 이 합리적인 선물을 처음에 사양하는 까닭 역시 좋은 엄마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는 책임감에 있다. 과로와 신경증으로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갓 태어난 내 아이를 생면부지 타인의 품에 맡기는 일이 더 나쁘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툴리>의 출산 및 산후조리 과정은 건조하다. 설령 신생아로 인해 흐뭇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해도 카메라는 산모의 피폐한 몸과 마음의 증세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그리고 눈물나는 몽타주가 이어진다. 끝없는 불면, 기저귀 쓰레기의 사슬, 젖이 돌아 아픈 가슴에 매달린 유축기, 어질러진 레고 블록을 밟고 지르는 비명. 엄마 되기의 공포를 그린 <바바둑>(2014)을 잇는 올해의 호러라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다. 결국 마를로의 결심으로 도착한 야간보모 툴리는 신기하리만큼 엽렵하게 아기와 마를로의 필요를 채워준다. 툴리의 일성은 “나는 당신을 돌보러왔어요. 당신과 아기의 행복은 별개가 아니에요”다. 젊고 아름답고 현명하기까지 한 20대 후반의 툴리를 보는 마를로의 눈길은, 영락한 소공녀가 빵집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시선과 닮았다. 무엇보다 툴리에겐 현재의 마를로가 잊어버린 인생의 방향감각이 선명하다. 마를로는 한때 툴리였다. 두 사람이 교외의 집에서 브루클린으로 밤 외출을 나가는 길이 얼마나 먼지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음악으로 표현한다. 10대의 마를로가 들었을 법한 신디 로퍼의 히트곡들이 카 스테레오에서 연속 플레이되며, 청춘의 시공간으로부터 주인공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가늠케 하는 것이다. 다양한 가수의 노래 메들리였다면 불가능한 부피감이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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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블로 코디는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이 연출한 <주노>(2007)로 오스카 오리지널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지만 나는 <툴리>의 시나리오가 영화의 밑그림으로서 훨씬 성숙하다고 느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장면 때문이다. 요리할 기력이 없는 마를로는 냉동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저녁을 차린다. 첫째와 둘째가 식탁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만 제지할 기력도 없다. 마침 퇴근해 이 광경을 본 남편 드류(론 리빙스턴)는 마를로의 티셔츠에 아이가 남긴 얼룩을 가리킨다. 그러자 마를로는 수건으로 닦거나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는 대신, 앉은 채로 훌렁 상의를 벗어버린다. 브래지어만 걸친 상체의 몸은 이리저리 늘어져 있다. “엄마, 몸이 왜 그래?” 딸의 질문이 상처도 남기지 않을 만큼 마를로는 둔감하다. 산후의 고통은 육아하는 고생이 전부가 아니라, 내 몸을 더이상 내 것으로 느낄 수 없는, 아기가 섭취하는 ‘리소스’로만 느껴지는 무기력 상태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편 마를로는 툴리에게 입을 옷을 고르는 행위가 한없이 귀찮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나의 몸이 어떤 모습인지, 건강한지, 심지어 내게 속하는지 희미해지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 아이가 뛰어노는 동안 소파에서 입을 벌리고 잠든 샤를리즈 테론은 100% 정말 잠이 든 것처럼 보인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대목에서는 특수분장을 동원해 철저히 변신했던 <몬스터>(2004) 때의 얼굴도 어른거린다.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은 <툴리>에서 샤를리즈 테론이 감행한 체중 조절에 관심을 갖지만 영화를 본 관객의 기억에 새겨지는 이미지는 마를로의 눈일 것이다. 그의 눈은 종종 뜬 채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많은 것을 애절히 호소한다. 동시에 내가 말한들 아무도 지금 나를 도울 수 없을 거라는 체념이 깃들어 있다. 남편 드류는 상냥하지만 지레 체념해 있다. 뭐가 힘든지 말하면 돕겠다고 암시하면서도 어차피 아이들은 당신을 원하고 당신이 나보다 더 잘 돌본다고 말하는 눈이다. 남편의 생각은 일부 옳고 크게 그르다. 엄마와 아이의 밀착도를 아빠와의 관계에 비할 수 없다는 명제는 아마 진실일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 몸 안에서 키워냈고, 출산 후에도 극중 대사에 따르면 아이의 유전자가 엄마 몸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엄마는 아기와 분리된 후 몸을 이루는 성분이 빠져나가 텅 빈 자루가 된 기분이고 체질이 아예 바뀌기도 하며 출산의 여파를 갱년기에 이르러 뒤늦게 체험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가 말했듯 출발부터 아이와 결합도가 낮은 아빠는 그래서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연적 조건으로 아이를 아내만큼 잘 돌볼 수 없다 해도 아내는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개인도 비난하지 않는 <툴리>가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바가 있다면, 모든 직장이 아빠에게 출산과 육아를 위한 휴직을 당연히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툴리>가 종장에서 드러내는 진실을 두고, 각본의 결정적 흠이라고 여기는 의견도 있을터다. 그러나 <툴리>는 이 ‘발견’을 “어때? 대단하지?” 하는 투로 영화적으로 길게 과시하지 않는다. 1분이 채 안 되는 몽타주로 짚고 넘어가면서, 영화적 트릭보다 마를로가 처한 상황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깊은 우려를 남기는 처절한 이야기임에도 <툴리>는 따뜻한 색과 톤의 비주얼을 택했고 엔딩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돌보는 의무는 삶을 빼앗아가는 재앙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따개비에 좀먹히는 배처럼 육아가 거꾸로 삶을 침몰시키지 않도록 반려자들이 함께, 매일 해야 하는 일이다.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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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영주>의 도입부에서 주인공(김향기)은 지나치게 밝다.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남매 중 맏이인 영주는, 하나도 힘들지 않고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명랑한 표정으로 남동생 치다꺼리를 한다. 그러나 동생은 누나의 배려를 당연히 여긴다. 희생하고 감내하는 전통적 여인상의 미성년 버전인가 답답함이 쌓일 무렵, 우리는 귀갓길에 집이 보이기 시작하면 영주의 눈에 서리는 엷은 피로와 두려움을 알아차리게 된다. 영주는 아르바이트로 과로할뿐더러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다. 부모를 잃은 후 충분히 울고 화내고 응석부릴 공간도 누리지 못한 소녀의 우울감이 과도한 긍정성으로 발현된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소녀가 찾아간 교통사고 가해자 부부는, 뜻밖에도 영주가 늘 목말라하던 것을 준다. 배우 김향기는 오랫동안 착하고 눈물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영주>에서 그의 맑은 얼굴은 다른 층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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