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이 멕시코의 마약계의 거물 파블로 에스코바(<나르코스>)나 80년대 뉴욕 뒷골목을 평정한 토니 몬타나(<스카페이스>)가 아니라 1970년대 대한민국 부산을 주름잡던 마약 유통업자 이두삼으로 ‘토착화’하는 데 배우 송강호의 존재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가족을 먹여살린다’라는 자신의 논리대로 움직여, 부패의 온상인 마약에 손대고 파멸하기까지. 10년간 펼쳐지는 에픽 안에서 송강호는 돈과 권력을 탐하던 자가 그 욕망의 정점에 섰다가 추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쥐락펴락하며 그 모두를 놓치지 않고 표현해낸다.
클로즈업된 이두삼의 얼굴 하나하나에 <넘버.3>(1997)의 삼류 건달의 코믹함이, <살인의 추억>(2003)의 형사 박두만의 페이소스가, <복수는 나의 것>(2002)의 아이를 잃고 극한에 몰린 아버지의 딜레마나 <남극일기>(2005)의 탐험대장의 핍박한 내면들이 어우러진다. 지난 20여년간 우리가 알아왔던 송강호의 모든 얼굴이 숨 돌릴 틈 없이 펼쳐지는, 송강호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연기다. <나랏말싸미> 촬영으로 바쁜 와중에 지방 촬영장에서 급히 올라왔다는 송강호를 만나, <마약왕>의 이두삼을 소환해봤다.
-지난해 여름, <택시운전사>(2017)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를 목도하는 택시운전사 김만섭으로 각인된 이후 차기작으로 <마약왕>은 파격적인 선택이 아닌가 싶다. 실화를 소재로 하고, 그 속의 가공된 인물을 연기했는데 두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나.
=사실 <택시운전사>는 마음이 무거운 영화다. 배우 입장에서도 무거운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는데, <마약왕>은 그런 점에서 좀 신났다. 어깨의 힘을 내려놓고, 연기자로서 마음껏 놀고 싶은 그런 지점을 준 작품이었다. 물론 한 인간의 파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마냥 가벼운 톤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궤에서는 오래간만에 하는 즐거움, 신남이 있었다.
-그간 작품들을 돌아보면 묵직한 서사 속에 각성하는 인물이 위주였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자기 욕망으로 치닫는 <마약왕>의 이두삼은 달랐다. 최근의 선택을 돌아보면 ‘배우 송강호는 무게 있는 역할,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이미지가 굳어지기도 했다.
=그 지적을 나도 많이 느꼈다. 어느샌가 많은 분들이 송강호에 대해 ‘아, 이거 하겠어?’ ‘이런 건 안 할 거야’ 그런다고 하더라. 희한한 거다. 자체적으로 1차 검열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 시나리오가 오기도 전에 다 걸러지는 거다. 그러다보니 ‘송강호는 사회적 함의를 지닌, 묵직한 메시지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라는 선입견이 형성돼버린 거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마약왕>이 들어왔을 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20여년 전 송강호의 모습, 좀 어설프지만 흥미를 주는 캐릭터의 모습이 이두삼에게 있더라. 대표적으로 <살인의 추억>의 형사 박두만 캐릭터나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넘버.3>, <초록물고기>(1997)의 삼류 건달 이런 모습들이 막 떠오른다. 15년 이상 그런 모습을 못 보았으니 관객도, 나도 갈증이 생기는 거다. 물론 젊은 층 중에는 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분도 있겠지만. (웃음)
-우민호 감독이 그런 배우의 갈증을 적절한 때에 포착한 것 같다.
=작품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인데, 나중에 보니 우리가 인연이 있었더라. 20년 전 박찬욱 감독과 내가 유럽에 갔다가 런던 한인 유학생 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우리가 대상을 준 작품이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2000)였다. 우 감독이 중앙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영국으로 유학 가서 만든 단편인데, 감독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여서 직접 상을 전달하지는 못했다.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첫 촬영 끝나고 우민호 감독이 그 이야기를 꺼내더라. 왜 전에 만났을 때 말 안 했냐니까 ‘언젠가 당당해지면’ 할 생각이었다고 하더라. (웃음)
-10년의 시간을 두고 변해가는 이두삼을 통해 한 인물의 연대기를 그린다. 그동안의 송강호 연기의 일면들을 조금씩 모자이크한 종합판 같은 시도였다.
=한 인물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으니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에는 소시민적이고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있고 허풍도 있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이다가, 점점 더 새로운 세계를 만났을 때의 혼란스러운 모습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들어가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절대 놓치려 하지 않는 야망이 나온다. 그릇된 야망인 거지. 그 감정과 행동을 한 작품에서 다 보여주니 내가 이전에 연기한 모습들이 조금씩은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두삼은 당시 활동하던 마약 유통 제조업자들을 여럿 조합한 걸 바탕으로 창작자의 상상을 더한 가공의 인물이다. 부산 민락동에서 ‘마약왕’이 체포되는 한장의 사진에서 이미지를 그렸다고 하는데,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물론 영화 속 이두삼은 그의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 활동하던 비슷한 마약왕들이 꽤 있었다고 하더라. 70년대 한국 사회에, 특히 부산에서의 그들의 활동으로 마약이 발을 붙이게 된 거다. 그 분위기 안에서 이두삼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나갔다. 어릴 적 <스카페이스>(1984) 같은 작품도 보고 자랐고 최근 <나르코스> 같은 드라마들도 봤지만, 사실 마약을 다루는 범죄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이든 멕시코든 마약이 유통되는 과정, 카르텔은 비슷하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적이라든지, 새롭게 하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그쪽 세계에 대한 인식은 같이 가지고 가면서 접근했던 것 같다.
-영화 초반 이두삼이 마약에 손대기 전, 미제 밀수품 업자로 동생들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키우는 가장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나쁜 일면으로 당시 서민적인 한국적 가장의 모습을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는 경제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먹고살기가 급급한 때였다. 당시의 사회적 가치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족이 먹고사느냐, 그게 제일 큰 가치였다. 그래서 새마을운동도 범국가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거다. 나는 그때 초등학생 어린 나이였고, 서울이 아니라 시골에 살긴 했지만 늘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이 새마을운동 노래가 온 동네에 울려퍼지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빗자루질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에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들, 가치들이 이두삼의 초반 모습에도 반영되었을 거다.
-<효자동 이발사>(2004)의 대통령 이발사 성한모 역할로 1970년 독재정권에서 핍박받던 서민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두삼은 같은 시대지만 그 시대와 결탁해 부를 축적하는 다른 얼굴의 캐릭터다.
=엄연히 존재했지만 잘 모르고, 알고 있어도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다. 1970~80년대의 이야기들은 주로 정치적인 베이스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건 좀더 피부에 와닿는 이야기더라. 이런 이야기를 강렬한 전개와 캐릭터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대중영화로서의 매력이 느껴졌다. 그때 우리의 판단이 결국 왜곡된 거다. 삐뚤어지고 왜곡된 건데, 이두삼 입장에서 보면 자기 합리화를 한다. 당시는 사회적 가치가 다양하지 않고 획일화된 시대였다. 그 시대에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다. 인물도 그렇게 접근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돌적인 느낌으로 가고자 했다.
-이른바 ‘한국적 악행의 수행자’인데, 70~80년대라는 독재정권과 부패의 시대를 다룬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1)의 비리 세관원이나 <강남 1970>(2014)의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자들을 통해 악이 표현되는 방식이 비슷하다. 분야는 다르지만 결국 정권과 결탁해 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면죄부를 받는 구조다.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행동이 용인되어왔다.
=악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들도 처음부터 그런 일을 하고, 망가진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그 지점까지 오게 된 인물이다. 마약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세계에 빠져들었지만 인간적인 번뇌나 고민, 혼자만 겪어야 하는 고통이 있었을 테고 영화에서 그게 표현되어야 했다.
-마약에 손대면서 결국 이두삼은 돈의 맛을, 권력을 알게 되고 이에 ‘중독’되고 ‘파멸’한다. 전·후반을 통해 변화한 다른 형태의 인물을 보여줘야 했다.
=이두삼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가공된 이야기 속 가상의 인물이다. 이두삼도 결국은 마약에 손을 대게 되고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 많이 빠져들고 파멸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게 굉장히 극적이다. 그 변화를 확연하게 드러내야 짧은 시간 안에 입체적인 이두삼의 인생의 굴곡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일의 변화도 보여줘야 했다. 초반 평범한 중년의 모습에서 거부가 되고 난 후에는 좀더 화려하고 스타일리시해지고, 파멸의 피폐함을 담기까지 과정이 그려진다. 지난해 겨울에 만났을 때는 <마약왕>을 막 끝낸 터라 체중 감량도 많이 한 것 같았다.
=특별히 체중 감량을 막 작정하고 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나보다는 김대명 배우가 이두삼 동생 이두환 역으로 나오는데 마약중독자의 퀭한 얼굴을 보여주려 감량을 많이 했다. 매 장면 나오는 게 아니니 시각적으로 도드라지는 지점을 보여줘야 하는 연기였다. 그런데 이두삼은 좀 다른 컨셉을 잡았다. 외형적인 변화는 뭐랄까, 이두삼이라는 캐릭터에 접근하는 데 좀 얇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오히려 이두삼이라는 인물, 마약왕이라는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하려고 우 감독과 상의하고 연기를 했다. 그런 점에서 신경을 많이 썼다.
-히로뽕에 중독되어 환각 상태의 이두삼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약왕>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자 물리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장면이었을 텐데. 어떤 부담으로 다가왔나.
=그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 경험이 없는 상황을 연기하다보니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더라. 참조할 자료들은 있었다. 실제 마약중독자들이 취하는 행동들이나 느낌들을 자료를 통해 보면서 행동을 습득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건 간접적인 경험이다. 책으로 보는 것을 내 몸으로 체화해야 하니 그게 가장 어려웠다.
-한 신으로 중독의 고통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이라 실제 촬영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얼마나 걸렸고, 몇 테이크나 갔나.
=금방 끝났다. (웃음) 그게 사실 감독의 입장이나, 나의 입장이나 경험하지 못한 절대적인 지점을 표현하는 거라 그런 연기는 자꾸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아니고 해서 그렇게 오래갈 수도 없다.
-우민호 감독의 전작 <내부자들>(2015)이 통쾌하게 맺음 짓는 결말이었다면, <마약왕>은 그 내면을 보여주며 나아가는 후반부에서 전작과는 결이 달라지는데, 영화의 톤도 그 지점에서 바뀐다.
=그게 이 영화의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실 좀더 다른 톤의 버전도 찍었다. 그렇게 가니 익숙하긴 한데 매력이 없더라. 우리 영화가 가려는 방향과 맞지 않았다. 영화로 인해 마약을 미화하자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악을 행한 범죄자들의 말로를 통쾌하게 보여주자는 의도나 또 교육적인 걸 주고자 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약이 결국은 인간을 파괴한다는 걸 반추하는 과정이었지만, 이 영화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연기를 하다보니 그런 방향이 더 짙어졌는데, 결론을 파격적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감독의 결단이었다. 우리는 감독의 그 결정을 존중해주고 박수쳐주는 거다.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촬영을 끝내고, 지금은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과정을 그린 조철현 감독의 <나랏말싸미>를 촬영 중이다. 이제 <마약왕> 개봉에 이르기까지 전에 없이 바쁜 일정이다.
=12월부터 내년 7, 8월까지 내가 아주 자주 나타날 거다. (웃음)
-지난 몇년간의 작업 속도와 비교하자면 내년엔 확실히 그렇다.
=2003년 이후 6년 정도는 1년에 거의 한편씩 했다. 지금도 <택시운전사>가 지난해 8월 개봉이었으니 1년하고 5개월 만에 개봉하는 거다. 의외로 관객은 내가 계속 뭘 한 줄 아는데, 띄엄띄엄하는 편이다. <마약왕>부터 따지면 내년은 세편이 한꺼번에 나오는 거니 나도 다시 바빠질 거다.
-차기작 이야기를 살짝이라도 안 할 수가 없다. 특히 <기생충>은 봉준호와 송강호의 재회라는 점에서 기대하게 된다. ‘백수’인 가정의 가장으로 대한민국 소시민의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 스틸만 봐도 묵시록적인 <설국열차>(2013)의 장중함과는 아주 다르더라.
=전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웃음) <기생충>은 한번도 보지 못한 그런 이야기, 익숙하면서도 기묘한 느낌이다. ‘봉준호의 영화’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영화고 봉준호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회심의 발언이 있다. <나랏말싸미>는 정말 아름다운 한편의 시를 읊는 그런 느낌이다. 아름다운 대사들도 많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왕 세종의 모습이 나온다. <마약왕>부터 세편 모두가 느낌이 많이 달라서 부담감도 크지만, 배우로서는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