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출연 존 카메론 미첼 제작연도 2001년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는 한창 만화책에 빠져 있었다. 하굣길에는 늘 대여점에 들러 대여섯권의 만화책을 빌렸고,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엑스재팬과 디르 앙 그레이 같은 비주얼록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방에는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에서 열리던 서울코믹월드에서 심혈을 기울여 산 코팅 굿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이런 모든 행위는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 무렵, 나는 동아리 활동 시간에 코스프레 동아리 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곳은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서브컬처의 통로였다. 매주 선배들이 들고 온 CD를 리핑해서 나눠 듣거나 신간 만화책 이야기를 하며 ‘덕질’을 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하루는 선배가 재밌는 영화를 한편 빌려왔다며 VHS 테이프를 비디오데크에서 틀었다. 커튼을 친 교실에는 햇빛이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고, 왁스칠을 마친 나무 바닥 냄새가 먼지 냄새와 뒤엉켜 올라왔다. 형형색색의 그래픽과 함께 기괴한 애니메이션이 화면 위에 펼쳐졌고, <Tear Me Down>이 교실 가득 울려 퍼졌다.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드윅>과의 첫 만남이었다.
뮤지컬영화 <헤드윅>은 동독 출신의 젠더퀴어인 헤드윅이 주인공이다. 동베를린에서 살던 소년 한셀은 성전환을 조건으로 결혼하겠다는 미군의 제안에 수술대에 오른다. 하지만 수술이 실패하며 남은 1인치의 성기만 가지게 되는데, 영화는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헤드윅의 삶과 드랙퀸 로커가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영화 초반부에 헤드윅이 <The Origin of Love>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가사의 신화적 내용이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지는데, 특히 간주 부분에 나오는 ‘deny Me and be doomed’(나를 부정하면 파멸하리라)라는 문구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 있다. 남들과의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애쓰며 자아를 찾아 헤매던 시기, 그 장면과 마주했던 순간은 막연히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삶의 정상성에 균열이 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헤드윅은 자신의 음악을 훔쳐간 토미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콘서트를 연다. 어떤 날은 관객이 한명뿐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드윅은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전하고, 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단 한명의 관객이 된 것처럼 그의 말을 듣는다. 타인의 진실된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에 커다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이후 극영화를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했다. 지난 5년 동안 한편의 장편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마주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헤드윅처럼 끈질기게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곤 했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라는 거대한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힐 때마다 ‘deny Me and be doomed’라는 영화 속 문구는 나에게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질문으로 남았다.
마민지 영화감독. 단편 극영화 <언어생활>(2009), <아폴로 17호>(2011), 중편 다큐멘터리 <성북동 일기>(2014)를 만들었고, 한국의 부동산 열풍을 가족 이야기로 풀어낸 장편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2017)가 올해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