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PMC: 더 벙커> 김병우 감독, "철저히 인물에 집중해 관객이 아는 사람처럼 느끼도록"
2018-12-27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정규군이 아닌 민간군사기업이 판문점 지하 벙커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불명예 제대한 한국군 출신인 에이햅(하정우)이 이끄는 민간군사기업 블랙리저드는 미국 CIA로부터 거액을 받고 군사작전을 펼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촌각을 다투며 미션을 완수해 살아돌아가는 게 이들의 임무다. 전작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 생방송이라는 한정된 상황에서 테러사건의 한복판에 휩쓸린 뉴스 앵커를 실시간으로 그려냈던 김병우 감독이 이번에도 자신의 장기를 꺼냈다. 시점숏, 드론 촬영 등 관객을 군사작전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영화 속 사건을 체험하게 하는 총격 신 연출은 신선하고, 인물을 극한상황에 몰아붙인 뒤 긴장과 이완을 반복해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언론배급 시사가 끝난 직후, 극장에서 김병우 감독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시사 전날(12월 18일) 저녁까지 후반작업에 매달려 다소 피곤한 기색이었다.

-시사 직전까지 후반작업을 했다고 들었는데 뭘 손본건가.

=특별히 손본 것은 없고 색보정, CG, 자막, 사운드를 한번 더 확인했다.

-전작 <더 테러 라이브>가 끝난 뒤 제작자 하정우가 판문점 지하 벙커라는 아이템을 제안하면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13년 10월 말쯤, (하정우) 선배가 지하 벙커 말고 여러 아이템을 제안하셨다. 그중에서 지하 벙커에 흥미가 갔다.

-한정된 공간이라서.

=그보다는 다른 사람이 가본 길이 아니니까. 판문점 지하 벙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모든 공간을 세트로 만들어 찍어야 할 것 같았다.

-한국군도, 북한군도, 미군도 아닌 민간군사기업이 이 공간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정하면서 무엇을 기대했나.

=흔히 전쟁영화는 국가와 이념을 갈등축으로 설정해 서사를 풀어가지 않나. 그런데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군사작전을 펼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인물의 사연과 고민을 더 풍성하게 묘사할 수 있고, 그러면서 기존 전쟁영화와 다르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병이 돈을 많이 벌려면 작전을 많이 성공해야 하고, 작전을 많이 성공하려면 그만큼 희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 처한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다.

-뉴스 클립으로 2024년 한반도 정세를 설명해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시나리오에 없던 부분인데.

=최근 급변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촬영할 때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는데 촬영이 끝난 뒤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원래 시나리오대로 밀고 나가는 건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급변한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설정을 추가할 필요가 있어 오프닝 시퀀스의 뉴스 멘트 내용을 바꿔 다시 찍었다.

-이 영화는 액션 장르를 외피로 두르고 있지만, 주인공 에이햅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야기다. 미국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존을 위해 용병으로 일하는 이 인물을 그리는 데 모델이 된 사람이 있나.

=특별히 모델이 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에이햅 캐릭터를 거의 다 설정하고 난 뒤 적절한 캐릭터 이름을 찾는 과정에서 허먼 멜빌 작가가 쓴 소설 <모비딕>의 주인공 에이하브 선장을 알게 됐다. 에이하브 선장은 사람들과 함께 흰 고래 모비딕을 잡으러 갔다가 한쪽 다리를 잃고 간신히 혼자 살아남은 인물이다. 소설에서 에이하브 선장이 고래에 집착하는 바람에 함께 배를 탄 사람들 모두 죽게된 것이다. 이런 설정들이 과거 사건에 어쩔 수 없이 집착하는 영화 속 에이햅과 닮은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소설 속 에이하브도, 영화 속 에이햅도 모두 캡틴이고. 이 소설을 알기 전, 시나리오상에서 에이햅의 이름은 마크였는데 심심하고 재미가 없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라면 영어 이름을 평범하게 짓지 않았을 것 같아 이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을 따와서 지금의 에이햅이 됐다.

-에이햅의 과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나리오와 달리 영화는 에이햅이 이끄는 블랙리저드가 작전에 투입되는 상황을 곧바로 보여준다. 편집에서 순서를 바꾼 이유가 뭔가.

=그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부터 과거를 곧바로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이 에이햅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전작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하정우에게 에이햅의 감정 변화 곡선이 그려진 심리 그래프를 그려주었나.

=에이햅뿐만 아니라 윤지의(이선균), 맥켄지(제니퍼 엘)의 그래프까지 그려 배우들에게 전달했다. 심리 그래프를 그리는 건 내가 편하게 연출하기 위한 목적인데 그래프대로 찍지만은 않는다. 현장 상황에 맞게 계속 바뀐다.

-하정우가 에이햅을 맡으면서 시나리오와 달라진 점이 있나.

=시나리오에서 에이햅은 이성적이고 냉철하며 차가웠는데 (하)정우 선배가 맡으면서 인간적인 면모가 좀더 드러났다.

-에이햅은 작전에 직접 뛰어들기보다 원격으로 팀원들을 지휘하는데 그의 동선을 한정시킨 이유가 뭔가.

=주인공이 적진에 뛰어들어 총을 쏘고 피하는 그림은 너무 예상 가능하지 않나. 또, 액션 장르를 표피로 두르고 있는 영화지만 작전 자체보다는 에이햅이 작전을 겪으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니까.

-이와 관련해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영화는 무엇인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1957). 잘 알다시피 카레이싱 촬영 도중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지한 채 자신의 방에서 이웃들을 훔쳐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에이햅과 그의 팀원들 또한 벙커 벽에 띄워 올린 크고 작은 스크린과 손목에 달린 화면을 바라보며 서로의 창(스크린) 안쪽 상황을 파악하지 않나. <이창>에서 남자가 창문을 본다는 설정이 우리 영화와 많이 비슷한 것 같아 참고했다.

-윤지의는 북한 최고의 엘리트 의사로, 북한 최고 지도자인 ‘킹’의 주치의다. 이선균의 어떤 면모가 윤지의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의사라는 직업적 특성보다는 영화에서 지의가 해내야 할 역할이 있었다. 에이햅이 영화 전체의 지도라면 지의는 지도의 빈틈을 파고들어 자리잡는 동시에 에이햅을 변모시켜야 하는 중책이다. 사건이 발생한 뒤 등장하는 캐릭터라 따로 소개하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에이햅보다 지의를 완성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웠던 것도 그래서다. 지의가 어떤 인물인지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촬영에 들어갔는데 노련한 이선균 선배가 지의의 빈곳을 잘 메워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레고로 벙커 세트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그리려다가 인물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레고로 벙커 세트를 만들었다. 판문점 지하 벙커는 가상 공간이지만 실제로 있을 법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냉전시기 북한에서 만든 남침용 땅굴로 발각된 뒤 남북한이 비밀 회담용으로 개보수해 사용해왔다는 배경도 설정해 대사로 알려주었다. 남쪽과 북쪽 구역의 디자인이 제각기 달랐을 거고. 북쪽은 김병한 미술감독과 함께 구소련 시절 벙커 사진들을 보면서 이를 많이 참조했다. 김병한 미술감독이 합류한 덕분에 그의 아이디어가 세트에 많이 반영됐다.

-에이햅의 팀원들이 군사작전에 뛰어든 모습은 <배틀 그라운드> <레드 데드 리뎀션2> 같은 콘솔 게임을 직접 하는 느낌이 들었다.

=에이햅이 등장하지 않는 공간에서 관객이 영화 속 상황을 체험하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한 것은 인물들에게 좀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총격 신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당분간 내 영화에 총은 없다. (웃음) 물리적으로 찍어야 할 컷 수가 너무 많고, 총격 신, 폭발 신, 특수시각효과(VFX) 등 어려운 장면이 너무 많았다.

-전작에서 한강다리(마포대교)도 폭파시키지 않았나. (웃음)

=이번 영화 또한 시나리오를 직접 쓴 까닭에 시나리오 그대로 옮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맨 벽에다가 크고 작은 스크린도 띄워야 하고, 할 게 너무 많았다. 영어 대사가 많았던 탓에 자막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황석희 번역가를 모셔 따로 감수받기도 했다.

-현장에서 카메라는 몇대나 투입됐나.

=드론 같은 장비를 제외하고 영화용 카메라는 3대를 동시에 돌렸다.

-이선균은 연기하랴, 카메라를 든 채 자신을 찍으랴 힘들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김병서 촬영감독이 지의의 시점숏과 에이햅과의 영상통화를 직접 찍으려고 했는데 너무 어색했다. 이선균 선배가 직접 카메라를 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에이햅과 윤지의, 출신도 성격도 다른 두 남자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애틋하더라.

=배우들이 연기하면서 감정이 더 풍성해진 것 같다. 하정우, 이선균 두 사람이 함께 찍는 장면이 거의 없었지만 현장에서 일부러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더라. 에이햅과 윤지의 둘은 서로 돕고, 도움을 주면서 감정을 쌓아가는 관계고, 현장에서 둘의 연기를 보면서 감정을 좀더 붙여놔도 되겠다 싶었다. 배우들 덕분에 둘의 관계를 과감하게 보여줘도 말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브로맨스 말인가. (웃음)

=아니, 그건 브로맨스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선 둘이 너무 부둥켜안긴 하더라. (웃음)

-전작에서 배우 김소진이 연기한 기자 이름도 지수고, 에이햅의 아내 이름도 지수인데. 혹시 지수가 여자친구인가.

=그건 아니다. 여자친구 이름을 왜 쓰나. 앞으로도 이 이름을 밀고 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다. 큰 의미는 없고 전작과의 연결고리 정도로 생각해주면 될 것 같다.

-영화 속 미국 대통령인 맥그리거는 전쟁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이 떠오르더라. 맥그리거를 구상할 때 참고한 미국 대통령이 있나.

=얘기한 대로 맥그리거는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을 참고해 만든 캐릭터가 맞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 때 용병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과 미국의 군사력을 미국 국내 정치에 즐겨 이용하지 않았나. 용병을 영화 소재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라크 전쟁과 관련된 책, 자료들을 찾다가 민간군사기업의 존재를 알게 됐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를 포함한 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하기 위해 민간군사기업에 소속된 용병들을 전쟁터로 많이 보냈다. 용병 사망자 수는 전쟁 기록 집계에 해당 사항이 안 됐다. 민간군사기업은 기업이다보니 이윤 창출이 우선이고, 그러다보니 도급 내용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전쟁터에서 용병들은 방탄도 안 되는 차를 몰았고, 탄도 넉넉지 않아 아껴 써야 했다는 상황들을 책에서 알게 됐다. 그 자료들을 통해 용병은 군인보다는 직업인 느낌이 강했고, 그 인상이 영화 속 블랙리저드팀에 반영됐다.

-전작을 찍고 난 뒤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꽤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무엇에 쾌감과 재미를 느끼는가. 사람들은 왜 극장에 가려고 하는가. 어쩌면 영화를 보는 행위는 친구를 사귀는 과정과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PMC: 더 벙커>는 관객이 에이햅의 선택을 지지해야만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전작이 인물과 사건 비중이 각각 절반씩 배분되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이번 영화는 철저히 인물에 집중하고, 영화를 보고 관객이 에이햅을 잘 아는 사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의 어떤 점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됐나.

=사건이 끝난 뒤 관객은 이야기가 통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윤영화.-편집자)가 거의 다 완성될 때쯤 사건에 떠밀려서 퇴장당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이번 영화에서 에이햅을 정우 선배에게 전적으로 맡겼던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다.

-또 밀폐된 공간에서 찍었는데.

=6개월에 한편씩 찍는 감독이 아니니 할 줄 아는 걸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람 쐬며 영화 찍고 싶은 생각은 없나.

=전혀. 밖에 나가면 더 고생이다. 세트장에서 찍으면 날씨 영향 받지 않고 규칙적으로 찍을 수 있어 로케이션 촬영보다 더 좋다.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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