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2008), <킹스 스피치>(2010),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 <노예 12년>(2013), <라라랜드>(2016), <쓰리 빌보드>(2017)….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면 무조건 뜬다는 속설이 있다. 올해는 <그린 북>이 이 상을 받았다.”(임수연) <씨네21>과 CGV용산아이파크몰이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GV) 프로그램 용씨네 PICK의 일곱 번째 영화는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 북>이었다. 2018년의 마지막 금요일, 12월 28일 진행된 이날 시사회에는 <씨네21>의 김현수, 임수연 기자가 참석해 당시 시대상과 흑인 인권 문제를 다룬 작품 계보에서 <그린 북>이 시사하는 바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린 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발간된 연간 여행 안내 책자로, 흑인 여행자들이 여행 중 생길 수 있는 희롱, 체포 또는 물리적인 폭력을 피해 여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했다. “미국 전역을 직접 운전하며 다닌 아프리카계 우편배달원 빅터 휴고 그린이 생존 도구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에서 만들게 됐다더라. ‘생존 도구’라는 표현이 되게 섬뜩하게 다가왔다”고 운을 뗀 김현수 기자는 흥미로운 제작기를 들려줬다.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흑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그의 운전사였던 이탈리아 출신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르텐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린 북>은 토니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각본을 쓴 작품이다. “어릴 적부터 40, 50년간 아버지가 돈 셜리의 운전사를 하던 당시 이야기를 듣던 아들이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피터 패럴리 감독을 찾아갔다.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 시나리오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김현수)
<그린 북>은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가 흑인 대우가 끔찍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로드무비다. 그는 허풍과 주먹만 믿고 클럽 등에서 일하던 바운서 토니 발레롱가를 운전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하는데, 처음에는 사사건건 부딪치던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무겁게 묘사된다. 임수연 기자는 “인종이든 문화든 서로 대치되는 지점이 있을 때 상대에게서 나에게 없던 것을 보고 시야가 좀더 넓어지느냐, 편협한 세계에 빠지느냐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린 북>은 전자의 태도로 인종의 벽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대중적인 화법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줄거리를 정리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갑과 을의 그것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린 북>을 특별한 버디무비로 만든다. 토니는 미국 사회에서도 백인 권력 집단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하층민이지만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거리낌 없이 주먹을 날릴 수 있다. 돈 셜리는 함부로 폭력을 휘두를 수 없는 흑인이지만 토니에 비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아티스트다. 김현수 기자는 “어느 한쪽 편을 들기도 모호하고 어느 한편을 적대시할 수도 없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관계”라는 감상을 전했다.
미국 사회에서 두 사람이 갖는 복잡한 위치는 극에서 자연스러운 코미디를 만든다. 이탈리아계 토니는 켄터키 치킨을 즐기지만 돈 셜리는 질색한다거나, 토니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돈 셜리가 대필해주는 신이 대표적이다. 임수연 기자는 “흑인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에서 코미디를 시도한 것에 대해 피터 패럴리 감독이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는 농담을 하지 않는 게 목표였고, 이 이야기에서 나온 유머는 모두 유기적으로 탄생했다고 답했다”는 매체 인터뷰를 소개했다. 두 사람이 아주 상반된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웃음일 뿐 <덤 앤 더머> 시리즈 등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화장실 유머나 작위적인 개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린 북>은 패럴리 감독의 중요한 진화라고 볼 수 있다는 데 두 기자 모두 의견을 같이했다.
백인 감독이 인종차별 이슈를 다루며 자칫 시혜적인 시각을 드러낼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극복했다는 분석이다. “무결한 백인이 시혜적인 태도를 베푸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다. 결점이 많은 토니의 성장은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그것으로 좀더 밀착될 수 있다.”(임수연) 한편 “사회적으로 좀더 여유로운 상황에 있는 토니가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마다 폭력을 휘둘러 돈 셜리가 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보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조금 불편했다”는 김현수 기자의 지적이 관객의 이목을 끌었다. 임수연 기자는 “토니는 인종차별적이고 폭력적이지만 돈 셜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의외의 태도를 보여준다. 토니의 캐릭터가 확실히 더 입체적이다. 상대적으로 덜 입체적인 돈 셜리 캐릭터는 마허샬라 알리의 연기에 기댄 면이 많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영화의 주 매력 포인트는 단연 두 배우의 호흡이다. 임수연 기자는 “마허샬라 알리는 <문라이트>(2016)에서 1막만 나오고도 극 전체를 지배해 당시 남우조연상을 휩쓴 배우다. 부지런한 비고 모르텐슨과 굉장히 대조적인 연기 방식을 선보이는데, 타고난 우아함을 기반으로 한 정적인 연기가 굳건한 성격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김현수 기자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 <폭력의 역사>(2005) 등에서 보여준 비고 모르텐슨의 이미지는 토니와 같은 이탈리아 남자와 잘 매칭이 안 된다. 실제로 20킬로그램 정도 살을 찌웠다. 평소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재미있는 면이 있었다”며 그의 연기 변신에 호평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함께한 관객에게 임수연 기자는 “어느 백인 평론가가 <그린 북>을 두고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표현했다가 비판받은 일이 있었다. 과연 지금 시대에 인종차별 문제가 얼마나 해결됐는지 다 같이 고민해봤으면 한다. 또한 다른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 이슈로도 관점을 확장해 영화에 대한 생각을 가져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현수 기자는 “토니의 관점에서 구술된 무용담을 전해 들은 아들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수평적이었을지 생각하며 영화를 복기해보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는 멘트로 마무리 인사를 했다. <씨네21>과 CGV용산아이파크몰의 용씨네 PICK은 앞으로도 매달 진행되며, <씨네21> 독자 인스타그램과 CGV 홈페이지 모바일 앱 이벤트 페이지를 통해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