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다섯가지 키워드로 보는 <말모이>
2019-01-17
글 : 김현수
강추장, 고처장, 꼬이장, 땡초장, 꼬치장...

제 나라 말과 글을 잃어버린 시대. 일제의 통치 아래 30여년의 세월을 보내던 경성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을까. 일본이 식민사관을 심는 일환으로 취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30년이란 세월을 버텨낸 사람들. 엄유나 감독의 데뷔작 <말모이>는 바로 이 당시, 민족의 얼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말을 기억하고 또 기록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전 편찬에 얽힌 당시의 노력을 다루면서 동시에 상상력을 가미해 흥행 영화의 공식 중 하나인 서민 히어로의 활약상을 다룬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당시 조선어학회의 목숨을 건 사투의 역사를 바탕으로 <말모이>가 다루는 우리말 지키기의 과정을 키워드별로 살펴봤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의 한장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사투리를 기록해 모아뒀던 말모이 원고를 미술팀의 노력으로 재현해냈다.
<말모이>의 조선어학회 회원들. 구자영(김선영), 임동익(우현), 류정환(윤계상), 조갑윤(김홍파), 민우철(민진웅), 박훈(김태훈)(왼쪽부터).

창씨개명의 시대

종로의 한 극장에서 매표와 보안을 담당하며 소일하던 김판수(유해진)는 아들 덕진(조현도)의 월사금(수업료)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고 있다. 덕진은 학교에서 월사금도 못 내는 주제에 창씨개명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핍박받는다. 영화의 배경인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 최후의 교육령인 제4차 조선교육령(1943년 4월)이 공표된 시기다. 사실 일본은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어 말살 움직임을 보여왔는데 조선총독부가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 과목으로 가르치게 한 것이 그 예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은 이때부터 조선어 강습원을 열어 제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1930년대에 이르면 일제는 조선의 학교와 관청에서도 일본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했고, 창씨개명 등을 종용하며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친다. 이 영화에서 판수의 아들 덕진이 학교에서 창씨개명을 강요받고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일체 쓰지 말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1943년은 교육과정에서 조선어 교육이 완전히 사라지던 해였다. 이즈음 판수는 아들의 월사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성역에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조선어학회 대표인 류정환(윤계상)의 가방을 훔치려 하는 바람에 조선어학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조선어학회

영화는 조선어학회 대표직을 맡고 있는 류정환이 1933년 북만주에서 말모이 원고를 들고 일본의 추격을 따돌린 뒤, 1941년 경성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류정환이 이끌던 조선어학회는 종로 어딘가로 추정되는 곳에 ‘문당책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점을 여는데 말이 서점이지 실상은 말모이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한 본부다. 류정환의 아버지 류완택(송영창)이 학교 이사장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친일 인사이기 때문에 일제에게 류정환과 조선어학회는 더욱 눈엣가시 같은 집단이다. 거의 007 스파이 작전과 다름없는 말모이 원고 수집 작업은 서슬 퍼런 일제의 눈을 피해 이뤄지는데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활약은 주시경 선생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 선생은 1911년에 말모이 작업을 주도한 이후 불과 3년 만인 1914년에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의 제자와 동료들이 그 작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뒤를 잇는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조선어연구회의 기관지 <한글>은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27년 2월에 창간했고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주도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꾸려진다. 바로 이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의 전신으로,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맞춤법 통일 작업을 시작했다. 첫 장면의 배경이 된 1933년은 바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한 해다.

조선어학회 류정환(윤계상) 대표의 역할은 실존 인물을 특정해서 모델로 삼지는 않았고,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에 휘말렸던 33인의 회원들을 종합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까막눈도 아는 오랑캐 호떡

종로 거리에서 누구도 당해낼 재간 없는 친화력을 지닌 판수는 어느새 조선어학회의 어르신인 조갑윤(김홍파) 선생과의 친분으로 조선어학회의 심부름일을 도맡게 된다. 그런데 사실 판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영화는 조선어학회의 말모이 과정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전에 글을 읽을 줄 모르고 일제 치하라는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판수의 모습을 공들여 보여준다. 판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판수의 어린 딸 순희가 호떡을 먹고 싶어 하자 류정환은 판수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떡이 왜 호떡인지 아니? 병자호란 때 중국인들이 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고 해서 오랑캐 호자를 써서 호떡이라 부른 거야. 이렇게 말의 뜻을 잘 알아야 해.” 호떡은 그저 호호 불어 먹으니까 호떡인 줄 알았던 판수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1930년대부터 동아일보사 주도로 사람들의 문맹 퇴치를 위해 애쓰던 브나로드 운동, 조선일보사의 주도로 벌였던 문자 보급반 운동 등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조선어 강습회를 비롯해 각종 한글 보급 운동에 동참했다. <말모이>의 전반부는 까막눈 판수가 실은 도둑과 피해자 사이로 만나게 된 류정환과 우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글을 깨우치게 모습이 유쾌하게 묘사된다. 한글을 배운 판수가 종로 거리를 간판이란 간판은 죄다 읽으며 누비는 장면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을 잠시 잊게 만드는 장치로도 쓰인다.

책방으로 위장했던 조선어학회. 실제 학회가 있었던 자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 130-1번지다.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

류정환과 판수가 지키는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의 감시 속에서 창고 가득 말모이 원고를 수집한다.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말을 수집해야 하고, 그 말들을 일일이 가려내 분류하고 그중에서 표준어를 지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제 류정환은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주시경 선생 시절부터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말모이 원고들을 모으면서 나아가 전국 각지의 사투리들을 수집해야 한다. 판수와 정환이 서로 믿음을 쌓아나가는 과정 이후에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부분이 바로 이 말모이 과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사람들의 언어는 지역과 풍습에 따라서 달랐다. 고추장을 강추장, 고처장, 꼬이장, 땡초장, 꼬치장 등으로 부르는 모습 등이 이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게다가 요즘이야 ARS 설문이나 이메일을 통하면 되지만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의 사투리를 모은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을 터. <말모이>에서는 조선어학회가 당시 발간 중이던 잡지 <한글>에 조선말을 수집한다는 광고를 내 전국에서 편지를 받는 것으로 이 과정을 묘사한다. 이렇게 전국에서 모인 말은 옛말, 새말, 사투리, 전문어, 고유명사 등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거치고 이후 표준어를 정하는 회의를 거치는데 무려 13년여에 걸쳐 진행된 말모이의 지난했던 과정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표준어를 정하는 회의다. 영화에서 가장 긴박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순간이 바로 표준어를 지정하는 회의 장면인데 영화에서 묘사되던 순간은 실제 역사에도 기록돼 있는 것을 각색한 것이다. 당시 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연희전문학교 출신 정인승이 어휘 풀이를 정리하면서 궁둥이에 관한 어휘를 수집해보니 엉덩이, 엉뎅이, 응뎅이, 궁뎅이, 응덩이, 응뎅이, 궁둥이, 방둥이, 방뒹이 등 수없이 많은 표현을 실제로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엉덩이를 볼기의 윗부분, 궁둥이를 볼기의 아랫부분, 그러니까 앉으면 바닥에 닿는, 근육이 많은 부분을 일컫는다고 사전이 정하고 있지만 이것을 누군가 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상상해보자. 아주 정교하면서도 복잡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일 것이다. 밖으로는 조선총독부의 목숨을 위협하는 탄압을 이겨내야 하고 안에서는 치열한 고민이 필요했던 그 순간의 아이러니를 영화는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시대 고증을 위해 판수(유해진)가 일하던 극장 간판은 당시 제작방식을 그대로 도입해 만들었다. 석달 이상이 소요됐다고.

민들레의 삶

1933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가 조직되고 전국에 흩어진 73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3년에 걸쳐 치열하게 회의를 거쳤던 말모이 편찬 작업은 조선총독부가 치안유지법 1조 내란죄를 적용해 조선어학회 회원을 일제히 검거하며 결국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체포된 회원들은 함흥까지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게 된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평생 동안 언어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회원들이 뭉쳐 만든 운동이었기에 하필 온갖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에 이름이 거론된 관련 인사들이 수없이 조사를 받아야 했다는 슬픈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말모이 원고는 끝내 빼앗기지 않았다. <말모이>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류정환과 김판수라는 두 인물의 우정을 상상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일제에 빼앗기지 않은 말모이 원고 덕분이다. 어느 누구도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2만6500쪽에 달하는 말모이 원고가 왜 발견됐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이런 운명적인 시대의 공기를 민들레의 삶에 비유한다. 민들레 꽃씨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다가도 담벼락이나 울타리 밑에 멈추거나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의 둘레에는 항상 있다’는 뜻의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 민들레들이 모여 말을 모으고 민족의 혼을 담아낸 과정이야말로 <말모이>가 보여주는 고통의 세월을 이겨내는 법이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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