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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이강현 감독 - ‘영화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적하는 힘
2019-01-24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얼굴들>은 다큐멘터리 <보라>(2011)와 <파산의 기술>(2006)을 만든 이강현 감독의 첫 번째 극영화다.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인 기선(박종환)을 중심으로, 기선의 학교에 다니는 축구부 학생 진수(윤종석), 기선의 옛 여자친구이자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와 식당을 새롭게 운영하려는 혜진(김새벽) 그리고 택배 일을 하는 현수(백수장)의 이야기가 자유롭게 엮인다. 산업재해에서 출발해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얼굴과 사회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갔던 전작 <보라>처럼 <얼굴들>은 자유롭게 이야기를 확장하고 그러면서 시스템 속에 점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문법과 관습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영화를 찍고 있는 이강현 감독을 만났다.

-프로덕션 노트에 “직전 작업에 대한 반동으로 다음 작업을 이어갔다”고 썼다. 전작인 다큐멘터리 <보라>를 끝낸 뒤 어떤 영화적 질문들이 생겨났고, 어떻게 <얼굴들>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이전 작업이 끝날 무렵, 다음 작업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그물을 던져놓고, 그중 기쁨이건 슬픔이건 참혹함이건 어떤 의미에서든 매력적인 것들을 모아서 영화를 만드는 행위가,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감정이 버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한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선생이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는 자기 반 운동부 학생에게 어느 날 문득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대상을 돌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겼다, 라는 이야기였다.

-전작과 <얼굴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화적 장면’이나 ‘영화적 대사’들이 애써 배제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당신에게 중요한 영화적 순간은 무엇인가.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찾지 못한 것 같다. 가장 매력적인 것들을 모아서 영화로 만드는 일을 나는 인생 혹은 세상의 가장 포토제닉한 순간을 영화로 만드는 거라고 표현하는데, 어쩌면 그게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영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모순된 말 같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에는 그런 것들에 대적하는 힘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찾는 과정에 있다.

-그런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영화를 위한 공부나 수련의 과정을 따로 거치지 않았다. 그냥 부딪치면서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을 해오며 쌓인 생각이고 감정들이다. 첫 번째 영화 <파산의 기술>은 내가 만든 세편의 영화 중 가장 하려는 이야기가 분명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명확한 이야기와 뚜렷한 기승전결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었고 두 번째 영화 <보라>에선 다른 방식을 시도했다. 그런데 세상에 그물을 던져놓고 기다리고, 그물에 걸린 것들을 모아서 조합하는 작업에서도 어떤 혐오감을 느꼈다. <보라>를 작업하며 접한 대상들이 고통의 주체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적어도 다음 영화의 화살은 나를 먼저 통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스스로를 먼저 정확하게 통과한 것들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기선을 행정실 직원이 아닌 선생님으로 설정하려 했다고.

=만약 기선이 축구부 진수의 담임이라면 매해 출석부 끝에 적혀 있는 운동부 학생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 같다. 반면 행정실 직원은 선생이 아닌데 그런 존재가 문득 학생에게 욕망을 갖는다면 ‘선생도 아닌데 왜?’라는 의문이 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망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것이 아닌 욕망, 그 갑작스런 욕망이 이야기와 캐릭터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어느 날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물건값을 치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문득 그때 보이는 얼굴이 내게 주는 감정 같은 것들.

-삶에서의 그런 ‘문득’이 중요한 요소였나.

=변할 것 같지 않은 삶에서, 허약하기만 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문득 들었던 그 순간의 감정이 우리가 유일하게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서사로 묶이지 않는 점점의 인물들이 있고, 그 점들은 어떻게든 연결된다. <얼굴들>을 보면서 이 영화가 하나의 지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지도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더라.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내가 어디 있는지, 나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존재와 위치에 대한 것들은 무궁무진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지도라는 것은 기술과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맵’ 안에서 우린 살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또한 점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혹은 혜진이나 기선의 삶이 어디서 어디로 향하든,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스템 속에 놓인 사람들이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느낌. 그럼에도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해 무언가를 일궈나가는 것, 그것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존재의 위치를 묻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존재들이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에 대한 영화에 가까울 것 같다. 혜진과 기선 모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혜진은 고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자기가 감각할 수 있는 걸 더 열심히 감각하려고 노력하고, 그로 인해서 반 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의 에너지를 담고 싶었다. 혜진이 자기 삶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하는 많은 일들이 비록 부박해 보이고 소용없어 보일지라도, 혹은 모조품 같은 것일지라도, 그 삶의 에너지를 긍정하고 싶었다.

-워낙 생생하고 일상적인 묘사들이 많아서 시나리오 없이 찍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두꺼운 소설 같은 시나리오가 존재했다고.

=우연적인 상황을 완전히 배제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전 작업에선 무엇이든 가능성이 열려 있고,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게 많았기 때문에, 이번엔 다른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또 이 작업은 애초에 비전이 제일 중요한 작업이었다. 비전이 명확하면 할수록 확고하면 할수록 촬영 현장과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촬영할 때 어려움이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겠거니 예상하고 찍었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장면은, 식당 리모델링을 하는 과정에서 김새벽 배우가 플랭크 동작을 취하는 장면 하나다. 끊임없이 자기를 단련하려는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고, 단단하게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얼굴들>은 첫 극영화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극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작업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언제나 영화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나 극영화가 같다는 뜻은 아닌데, 어떻게 다르냐 하면 사과와 배가 다른 것과 같지 않을까.

-차기작 계획은 어떻게 되나.

=아마도 다큐멘터리가 될 것 같은데 이 작업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는 아직 모르겠다. 지도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 작품이고, 계속 개발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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