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좋아합니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육상을 그만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45살의 패밀리 레스토랑 점장에게 돌직구로 고백해버린다. 주변에서 줄줄이 구애하는 또래 소년들은 뒷전이다. 전설적인 달리기 실력만큼이나 거침없는 17살 소녀의 로맨스가 적잖이 걱정스러울 무렵,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순정 멜로를 표방하지만 실은 성장스토리가 목적지임을 영리하게 드러낸다. 일본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동명의 원작 만화를 읽고 보니 그제야 이해가 간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이 여고생을 향한 판타지에 매몰되지 않고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몇 가지 미덕을 정리해봤다. 섣불리 꿈을 포기한 청소년이 미래가 없는 어른을 좋아하는 이 난감한 형국을, 영화는 제목처럼 산뜻하고 선명하게 풀어나간다.
난감한 로맨스지만 완급 조절만큼은 확실히
솔직히 인정하자. ‘여고생이 40대 아저씨를 사랑하는 내용’으로 뭉뚱그려 생각하면 뻔하고 후지다는 첫인상을 피하기 힘든 이야기다. 지천에 널린 훈훈한 또래들을 물리치고, 마치 정해진 수순인 양 홀아비를 사랑하는 소녀라니. 그런데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이 로맨스의 난감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오히려 이를 적시함으로써 효과적인 이해의 단서들을 부연해나간다. 아키라(고마쓰 나나)의 소꿉친구는 점장 마사미(오이즈미 요)를 처음 보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완전 아저씨”라고 일축하고, 마사미가 아키라의 친구와 평범하게 대화하는 모습만으로도 누군가는 “무슨 일이에요? 치한이에요?”라고 묻는다. 아키라의 고백을 듣고 걱정스러워진 마사미가 집에서 하릴없이 텔레비전을 틀자 대뜸 “45살 식당 종업원이 17살 여고생을 추행했습니다”라는 뉴스가 나와서 기겁하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데 꽤 능한 인물인 마사미는 아키라와 무해한 관계가 되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애쓴다. 배우 오이즈미 요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구애를 거절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푹 빠진 소녀의 마음을 다치게 않게 하려는 노력을 섬세히 표현했다. 메가폰은 쓰마부키 사토시가 주연한 코미디영화 <져지!>(2014)로 데뷔한 나가이 아키라 감독이 잡았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2015), <데이이치의 나라>(2017) 등을 거치며 코미디와 서정적인 드라마 양쪽 모두에 재능을 보인 감독이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에서는 아키라가 태풍을 뚫고 독감에 걸린 마사미의 집을 찾아간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한밤중에 마사미의 집에서 어색하게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멜로의 전형 같지만, 장면의 마무리를 보고 나면 인상이 좀 달라진다. 해열 패치에 마스크로 무장한 마사미는 택시 창문 너머로 아키라에게 차비를 쥐여주다 말고 강풍에 날아가버린다. 영락없는 슬랩스틱 코미디다.
인기 만화가 영화를 만났을 때
남성 독자를 겨냥한 청년 만화인가 했는데 어느새 슬쩍 성장과 치유의 스토리로 귀결된다. 마유즈키 준이 쓴 동명의 만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일본에서 현재까지 누적 판매부수 약 212만부를 기록한 베스트셀러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육상을 쉬게 된 17살 소녀 타치바나 아키라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점장 콘도 마사미에게 구애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클래식한 순정만화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받은 연약한 그림체, 깨끗한 감성, 시적인 대사 등이 인기의 주요 요인이다. 주간 만화잡지 <빅 코믹 스피리츠>에 연재한 만화는 지난해 완결됐다. 그사이 2018년 1월에 <후지TV>가 12부작 애니메이션으로 방영했고,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일본에서 5월 25일에 개봉해 꽤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우선 돋보이는 것은 애니메이션과 영화 모두 원작 캐릭터들의 외양을 충실히 구현했다는 사실이다. 조연들의 머리 모양새까지도 대체로 일치할 정도다. 특히 주인공 타치바나 아키라 특유의 스타일, 까만 긴 생머리에 싹둑 자른 앞머리는 아키라를 연기한 배우 고마쓰 나나의 아이코닉한 스타일과도 비슷해 제작 초기 단계부터 캐스팅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영화화 각본은 <가구야 공주 이야기>(2013), <메리와 마녀의 꽃>(2017) 등을 쓴 사카구치 리코가 맡았다. 애니메이션에서 활약했던 작가답게 순진한 감수성을 자연스레 구현했고, 연재 만화의 긴 이야기에서 주요 에피소드를 깔끔하게 엄선했다.
고마쓰 나나라는 이례적 얼굴
누군가는 이 영화를 ‘포니테일을 하고 패밀리 레스토랑 유니폼을 입은 고마쓰 나나가 망고 파르페를 파는 영화’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의 타치바나 아키라는 고마쓰 나나라는 라이징 스타가 연기한 덕분에 비로소 완벽해졌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비가 내리는 감성적인 그림 혹은 극도로 쨍하고 화사한 그림을 강조하는데, 고마쓰 나나는 모델 출신 배우답게 풀숏에서 풍경의 일부로 배치되었을 때도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매컷이 화보라는 표현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캐릭터와 배우가 꽤 공통점이 많다는 묘한 우연의 힘도 있다. 아키라는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종종 사람을 노려본다는 오해를 받곤 하는 눈빛의 소유자다. 그냥 쳐다보는지 째려보는지 구분하기 힘든 눈빛은 고마쓰 나나가 모델로 성공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국적이고 모호한 눈빛으로 패션지 독자들을 사로잡은 그녀다. 다만 출연 배우가 너무나 포토제닉한 피사체인 나머지 종종 영화가 버리지 못한 장면들도 눈에 띈다. 원작 만화가 태생적으로 피할 수 없었듯, 남성의 판타지를 겨냥한 관음적인 숏들은 분명 비판의 여지가 있다.
반짝반짝한 일본 성장영화의 감수성이란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영화는 만화에 비해 좀더 쾌활하고 시원한 보폭을 갖췄다. 눈이 부신 여름날의 학교운동장에서 시작해 창가 책상에 엎드린 고마쓰 나나의 얼굴로 단숨에 들어가는 도입부의 카메라워크가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리듬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남들보다 몇배나 민첩하다고 알려진 소녀의 발걸음을, 트랙을 질주하는 육상부 아이들의 움직임을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따라가는 영화다. 과장된 만화적 제스처 없이도 만화의 활기를 구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할까. 결과적으로 순정물, 청춘물의 컨벤션을 모아두었는데도 산뜻하고 뭉클하다는 게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가장 큰 장점이다. 힘차게 내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파열된 아킬레스건처럼, 아키라는 서툰 사랑의 추돌사고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건 폭우는 아무리 거세다 해도 언젠가 그칠 거라는 것을 전제로 시작된 이야기다. 섣불리 머무르지 말라는, 비가 개면 우산을 접고 다시 갈 길을 가라는 신중한 조언이 오랜 짝사랑에 대한 소고 속에서 전달된다. 잔뜩 흐린 날들 뒤에 찾아온 맑은 날의 반짝임이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