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그녀는 마치 누군가 콜타르를 칠한 바구니에 넣어 강물에 띄워보낸 아기처럼 여겨졌다. 강둑에서 그가 건져올릴 수 있도록 띄워보낸.” 사랑이라는 감정에 내재된 견딜 수 없는 애처로움을 말한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너무나 적확해서 읽는 이를 부르르 떨게 만드는, 그런 문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거친 강물에 떠밀려 마침내 운명의 품에 안긴 그 아기의 얼굴을 줄리엣 비노쉬에게서 보았다. 사과빛 뺨, 어린 사슴의 눈동자, 반투명한 피부. 쿤데라의 소설을 각색한 필립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1988)에서 꼭 한번 만난 남자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처녀 테레사로 분한 비노쉬는 새벽 샘에서 갓 건져올린 듯 양순하고 맑았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섹스에 몸을 싣고 의무와 헌신의 세상 속을 마냥 미끄러져 가길 원했던 한 남자가 모든 원칙을 깨고 그녀를 문 안에 들인 까닭을 우리는 스물네살 비노쉬의 얼굴을 통해 납득했다. 13년이 흐른 지금도 줄리엣 비노쉬는 여전히 당신이 결코 내칠 수 없는 여자다. 정숙의 계율에 노예가 되어 평생을 산 <초콜렛>의 마을 주민들마저 그녀가 금욕의 사순절에 내미는 초콜릿을 거절 못하지 않았던가.
빨간 외투 자락을 날리며 잿빛 마을에 도착한 미혼모 비앙이 빚어내는 초콜릿은 매맞는 아내에게 각성제가 되고, 죽어가는 할머니에게 활력이 되고, 소원해진 남편에게는 ‘비아그라’가 되어 온 마을이 홍조를 띠게 만든다. 음악가, 화가, 작가 등 예술가로 유난히 자주 분했던 비노쉬는 이 영화에서 초콜릿의 시인이 된다. 온통 진한 ‘블루’로 채색되고 ‘데미지’로 채워진 줄리엣 비노쉬의 무거운 필모그래피 중에서 영화 <초콜렛>은 귀여운 간주에 불과할지 모르나, 비앙이 따사롭게 내뿜는 ‘치유’의 힘을 가진 여성성(femininity)은 <초콜렛>을 줄리엣 비노쉬 전작의 자매로 묶어준다.
제 영혼의 흉터가 너무 끔찍해 타인의 상처로 눈을 돌려버린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의 간호사 한나 역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안았던 비노쉬는 이후 할리우드로 선회하는 대신 첫사랑인 연극 무대로 돌아갔다. 런던에서 루이지 피란델로의 <네이키드>를 공연하며 부상까지 입었던 그녀는 요즘 브로드웨이에서 해럴드 핀터의 <배신>에 출연중이며 <초콜렛> 전에는 <생 피에르의 미망인> <앨리스와 마틴> 등 세계 흥행 전망이 흐릿한 프랑스영화를 찍었다. “안전하고 싶다면 영화는 적당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비노쉬에게 영화는 아직, 위험하면서도 흥미로워야만 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세피아빛 드레스를 끌고 베를린영화제 기자 회견장에 들어서는 줄리엣은 탐스럽게 핀 한 송이 달리아처럼 붉고 건강했다. 한때 파리해졌다고 느꼈던 아름다움은 다년생 화초처럼 어느새 원숙한 두 번째 꽃잎을 열고 있었다.
그녀는 초콜릿 마스터에게 수업한 덕에 초콜릿 굳히는 온도, 적당한 윤기의 비결을 배웠노라 명랑하게 자랑했지만, 서른일곱의 여배우가 터득한 섭리는 분명 그것만이 아닌 듯했다.
초콜릿이 특별한 이유는.
초콜릿 찬미자로서 제목만 보고 <초콜렛>을 택했다.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온갖 연령의 여성캐릭터, 그들간의 다양한 관계에도 매료됐다. 초콜릿은 놀라운 품성을 지녔다. 고대 마야, 아스테카 문명에서는 신의 상징으로 쓰였고 육신의 여행을 뜻했다고 한다.
어떤 초콜릿을 좋아하나.
다크 초콜릿, 화이트 초콜릿, 밀크 초콜릿 모두 사랑한다. 그들은 마치 영화와 같다. 검은 초콜릿을 택하면 흰 초콜릿이 먹고 싶고, 반대를 골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난 영화 속에서 초콜릿을 만드느라 바빠 별로 먹지도 못했다!
외국어 연기가 어렵진 않은지.
그렇지 않다. 진짜 힘든 건 언어와 무관하게 영화의 한순간에 최대한 진실해지는 것이다. 사실 영어영화를 마치고 프랑스어영화를 시작할 때면 ‘맙소사, 프랑스어는 너무 어려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다시 영어영화를 찍게 되면 “맙소사, 영어는 더 심하잖아”라고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