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가버나움>, 베이루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2019-02-13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등록되지 않는 삶, 구원은 가능한가

영화 <가버나움>의 매 장면은 ‘도대체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끊임없이 반성을 요구한다. 혼돈의 도가니 ‘가버나움’으로 환유된 베이루트 길거리에 내던져진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과 그를 둘러싼 삶의 풍경은 영화를 보는 행위를 하는 것 마저 죄스럽게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은 특히 자신의 존재를 배역에 완전히 녹여낸 소년 자인에게 쏟아졌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신파적 스토리나 네오리얼리즘을 연상케 하는 형식보다 자인의 얼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다른 요소를 말하기에 앞서 그의 스타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눈빛(김소희)을,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김혜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의 쓰게 된 가장 큰 동력 역시 자인의 얼굴이다. 하지만 스타성이나 카리스마에 매료된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연기는 보통 배우들의 명연기가 주는 울림과 차원이 다르다. 많은 평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의 눈빛과 몸짓에는 중년 이상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무게가 배어난다. 그것은 경탄할 만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쪽에 가깝다. 열악한 서커스단의 소년 곡예사가 인간의 육체적 경지로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이를 보여줄 때, 그의 고된 훈련과 그것을 이겨낼 수밖에 없는 생의 절박함을 연상하고 느끼게 되는 종류의 연민과 비슷할 것이다. 거기에 그 연민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 윤리적 중압감이 더해진다. 이 영화에 관한 모든 정보가 ‘이것은 픽션이 아니다. 실재하는 삶이다’ 하고 외치고 있을 때 우리는 스크린 위의 자인과 스크린 밖의 자인을 분리하기 어렵고, 그의 어린 육체에 조로(早老)한 영혼을 깃들게 만든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느끼게 되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가버나움>은 관객의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지만 이 작품 자체가 윤리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 영화가 야기하는 일차적 불편함은 형식에서 기인한다. 관객의 감정을 쥐어짜내기 위한 공식처럼 감상적인 배경음악을 기계적으로 활용하고,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의 존재에 동의했는지 알 수 없는 피사체들의 무기력한 눈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사운드와 이미지의 조합이 요구하는 감정이 너무 선명해 민망할 지경이다. 슬픔, 분노, 절망, 좌절, 감동 같은 감정적 반응들. 그것은 이 영화를 야기한 실제에 비하면 너무나 무력한 것들이다. 무책임한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폭력성에 아무런 방패막이 없이 노출된 어린이의 삶에 타인의 감정이 어떤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을까. 물론 이 영화로 촉발된 ‘가버나움’ 재단은 그 감정들이 실제의 변화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도 했다. 재단이 영화에 출연한 아동과 그들의 가족을 빈곤과 혼란의 도가니에서 구출해낸 것은 현실과 픽션을 누비질한 이 영화의 형식적·내용적 시도가 닿을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가버나움>의 선한 기획의도와 그것이 낳은 실제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결론에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특히 신분증 사진을 찍는 자인의 클로즈업 숏은 그 혼란의 정점이다. 자인은 카메라를 보며 굳은살처럼 각인된 성난 표정을 짓는다. 사진을 찍는 이가 말한다. “자인, 웃어. 사망진단서가 아니라 신분증 사진이잖아.” 자인은 머쓱한 듯 미소를 짓는다. 자인의 미소는 영화 내내 관객이 가장 갈구했을 만한 화면이다. 이 숏은 자인과 함께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가 담긴 깡통요람을 따라 베이루트의 골목길을 포복하듯 끌려 다녔던 관객의 피로감을 일시에 보상해준다. ‘이제 자인의 고통이 정당한 신분증으로 보상받겠구나’라는 기대감. 바로 그 뒤를 이어 이 영화가 칸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자인과 그의 가족이 노르웨이에 정착했다는 부연설명이 등장한다. 이제 막연했던 기대감은 안도감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영화를 곱씹어보면 이 안도감이 이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실제의 무게에 비해 너무 쉬운 타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가버나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고통은 ‘등록되지 못한 삶’이라는 데서 시작된다. 아이들을 생산할 뿐 양육에는 무심한 자인 부모의 다섯 아이들은 출생증명서가 없어 교육이나 의료 같은 사회의 기본적인 지원에서 제외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은 요나스를 임신하는 바람에 가정부 일자리를 그만둬야 해서 합법적인 신분을 잃었다. 당연히 요나스도 자인처럼 출생 증명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요나스를 바퀴 달린 가방에 숨기고 일을 다니는 라힐은 위조 신분증을 얻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영화는 자인이 부모를 떠나 라힐과 유사 가족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양육자들의 상반된 태도를 대비시킨다. 교도소 안으로 약물을 불법으로 반입하는 데 아이들을 동원하고, 11살짜리 어린 딸을 팔아버리는 무책임한 자인의 부모와 온힘을 다해 요나스를 지켜내려는 라힐을 대척점에 세운다.

아이들을 사회적으로 등록하는 데 무심했던 자인의 부모와 부단히 노력했지만 등록에 실패한 라힐은 양육자로서 윤리적인 태도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들이 실제로 세계에서 차지하게 된 지위는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은 개인의 노력에 상관없이 응답하지 않는 사회구조에 대해 말하는 대신 개인의 노력에 영화적으로 보상함으로써 실제의 폭력성을 봉합해버린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나이에 임신해 과다출혈로 병원에 실려간 딸 사히르(하이타 아이잠)를 잃고, 아들 자인에게 방송과 법정에서 모욕당한다. 반면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구치소에 갇힌 후 요나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다가 공권력의 힘을 빌려 불법 해외 입양 갈 처지에 있던 요나스와 극적으로 상봉한다.

자국으로 추방되는 라힐은 공항에서 요나스를 돌려받으며 짓는 미소와 신분증 사진을 찍는 자인의 환한 미소. 그들의 미소는 관객에게 사회구성원으로 등록되지 못했던 그들이 서류를 갖춤으로써 사회적으로 소거되었던 주체의 존엄을 복원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안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등록되지 못한 존재로서 그들이 겪은 모든 고통과 불안을 종식시키는 온당한 길이 될까? 자인이 소년원에서 복역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그 사회구성원으로 기입될 수 있었다면, 즉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서류를 얻게 되었다면 그의 불행은 오로지 부모들의 나태와 무지의 소산이었다는 말이 된다. 라힐이 요나스를 돌려받는 것이 해피엔딩이라면 그녀가 단속반을 피해 도망다닌 것은 목적 없는 고행이었다는 의미인가?

<가버나움>의 한계는 자인과 요나스의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된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지 못하고, 섣부른 화해로 모든 것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해버리는 데 있다. 감독이 연령도 불분명한 자인이 살인죄로 기소된 사건 대신 그의 부모를 고소하는 사건의 변호인(나딘 라바키)으로 등장하기로 했을 때 그 한계는 이미 정해졌다. 자인의 엄마(카우사르 알 하다드)가 ‘나처럼 살아봤어요?’라고 항변할 때 자인의 변호인이자 영화의 연출자인 나딘 라바키가 준비한 것은 침묵뿐이다. 슬픈 눈으로 응시할 뿐이다. 그것이 베이루트의 혼돈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자 태도다. 거기에는 베이루트의 길거리에 떠도는 수많은 자인들과 그들을 ‘벌거벗은 삶’으로 방치한 부모들에 대한 연민이 있을 뿐, 그것을 배태한 세계에 대한 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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