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주성철 편집장] 여성배우 잔혹사
2019-02-22
글 : 주성철

“우리 다 실업자예요.” 한 영화의 DVD/블루레이 음성해설 녹음은 극장 상영이 종료되고 대략 3~4개월 뒤에 감독, 배우, 스탭이 모여 진행하기 마련이다. 2008년 1월 10일 개봉해 400만 관객을 모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 DVD에서 임순례 감독과 배우 문소리, 김정은, 이렇게 세 사람이 참여한 음성해설을 듣다가 영화의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생순>에 핸드볼 선수로 출연한 여배우 모두 (음성해설을 녹음하는 바로 그 시점에)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고백에 충격을 받은 적 있다. 영화에서 효명건설 핸드볼팀은 핸드볼 큰잔치에서 우승하고도 해체되는 것으로 나오는데(해체와 동시에 직원 신분을 유지하며 일반 사원으로 남는 상황인데, 문소리 배우가 연기한 미숙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적막을 깨며 ‘정직원인지 계약직인지’ 확인하는 ‘웃픈’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는 해체되지 않고 더 나은 팀에 인수됐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핸드볼팀을 해체하는 설정으로 그려서 죄송했다는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문소리 배우가 그에 빗대 “영화 속 핸드볼 선수들처럼 우리도 실업자 신세다. 아무도 차기작이 없다”고 얘기한 것이다.

실제로 문소리 배우는 같은 해 <사과>(2008)라는 영화가 개봉했지만 사실 2004년에 이미 촬영을 끝내고 뒤늦게 개봉한 경우였고,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날아라 펭귄>(2009)과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2010)에 출연했다. 주류 상업영화 출연은 <스파이>(2013) 때까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당시 깊이 각인돼 있던 코믹한 이미지를 벗어던진 김정은 배우도 이후 <식객: 김치전쟁>(2010) 때까지 작품이 없었고, <우생순>에서 가장 놀라운 연기 변신을 보여주며 그해 거의 모든 영화상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휩쓴 김지영 배우는 민병훈 감독의 독립영화 <터치>(2012)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골키퍼를 연기한 조은지 배우도 공포영화 <요가학원>(2009)에 출연하기까지 얼마간의 모색기가 필요했다. 음성해설을 들으니 진짜 그랬다. 당시 실제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아줌마’ 선수들처럼 30대 중반이던 배우들이 여전한 육체적 강인함을 보여주고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경우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거의 모든 매체가 ‘30대 여배우’라는 말을 전성기가 지났다는 의미로 별생각 없이 쓰던 때였다.

지난 1193호 커버스타로 <SKY 캐슬>의 배우 염정아를 만났다. 그리고 이번 1194호 커버스타는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네 배우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이다. 지난해 <허스토리> 개봉 당시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다섯 배우를 초대했던 커버가 떠오른다. 시대극에서 언제나 수동적이고 한없이 침잠하는 여성 캐릭터가 아니라, 마치 <암살>(2015)의 안옥윤(전지현)처럼 뜨거운 에너지를 지닌 캐릭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대담에서 고아성 배우는 ‘한국영화계의 여성 배우 라인업’이 두터워지길 기대했다. 오래전 <우생순>의 기억을 넘어 <SKY 캐슬>과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빛낸 여성배우에 이르기까지, 멋진 차기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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