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스카이 캐슬이라는 파국
2019-02-27
글 : 권김현영 (여성학자)
일러스트레이션 : 마이자 (일러스트레이션)

주말 밤, 별생각 없이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자세를 고쳐 앉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JTBC 드라마 <SKY 캐슬> 얘기다. 드라마의 중심에 있던 명주(김정난)는 겨울밤 비틀거리며 집을 나와 호화로운 주택지구 한가운데 꾸며진 눈 덮인 연못 옆에서 장총으로 자살한다. <SKY 캐슬> 1회는 이 ‘역대급’ 엔딩으로 즉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파국을 다루는 태도였다. 그동안 다른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감춰둔 비밀이 밝혀지는 건 곧 파국을 의미했다. 하지만 <SKY 캐슬>에서는 다르다. 등장인물들은 잠시 주춤할 뿐 곧 태세를 정비한다. 범죄, 죽음, 광기가 도처에 널려 있고, 이 모든 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죽음조차 이들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명주의 자살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삶을 멈추는 행위가 아니라 삶을 살해하는 행위로 매우 스펙터클하게 묘사되었다.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불안을 불러온다.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드라마 중반에 주요 등장인물이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이 드라마는 파국 이후의 파국, 파국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를 다룬다. 드라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필연적인 체제 붕괴로 이어지며, 파국은 그 이후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희망이기도 하다는 마르크스적 진단은 ‘틀렸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에는 파국 이후에도 대안이 없다. 아니, 이 세계에는 근본적인 대안 따위는 가능하지 않으며, 바로 이렇게 대안이 없는 것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우리 모두가 믿을 때, 우리는 20회 같은 엔딩 외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 드라마를 보는 좌파들은 이수임(이태란)에 대한 대중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대안을 말하는 방법이 신속하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한서진(염정아)의 욕망은 스스로 출세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를 자격을 취득하고자 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욕망의 전부다. 한서진에게 잘못이 있다면 성별과 계급으로 인한 구조적 제약에 ‘저항’하지 않고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그 이유는 단지 “우리 애들도 우리만큼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모욕하고 벼랑 끝에 밀어붙이는 사회에서 특권에 대한 과시적 욕망이 어떻게 평범한 개인들의 생존 투쟁기로 재배치되는지를 이 드라마는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아이가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없는데.

하지만 미래를 현재의 연장된 세계로 이해하는 순간, 예측 불가능성을 예측 가능성으로 변환시키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는 것만큼,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SKY 캐슬>에서 유일하게 다른 출신성분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캐슬 사람들의 안정된 영역을 마구 흐트려놓았던 혜나(김보라)가 없는 세계는 미래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세계다. 혜나의 죽음은 곧 다른 세계에 대한 가능성의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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