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세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든 ‘악’으로 상처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흔한 방법 중 하나다. 더 최악의 세계를 묘사하는 덜 흔한 방법이 있다.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든 악에 물들고 심지어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 <가버나움>은 최악의 세계 중에서도 최악을 보여준다. 이 세계가 최악 중 최악인 이유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악을 별생각 없이 흉내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은 없다. 어른들처럼 마약을 팔고 인신매매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레바논에 사는 12살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다. 자인의 부모는 11살짜리 딸을 성인 남자에게 팔아넘겼다. 어린 나이에 임신한 자인의 여동생은 끝내 병원에서 사망한다. 분노한 자인은 사내를 칼로 찌르고 범죄자로 전락한다. 법정에 선 자인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끔찍한 삶을 살게 만든 부모를 고소한다.
누구는 <가버나움>을 보고 부모가 아이들을 버리거나 팔아넘기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중세의 잔혹동화를 떠올릴 수 있다.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유럽의 잔혹동화는 상징이 아니라 가난이라는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민중의 대처법을 적나라하게 담아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턴의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할리우드는 잔혹동화를 적극 재활용했다. 과거의 비참은 현대의 허구물을 위한 풍부한 레퍼런스가 되었다. 이제 넷플릭스 유저들은 <그림형제> 시리즈를 감상하면서 자신의 취향을 갈고 닦을 뿐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에 감상이란 단어를 적용할 수 있을까? <가버나움>은 미래 영화를 위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까? 영화의 배우들은 실제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영화를 통해 얻은 혜택은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아니다. 영화 이후 이들은 레바논의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에 임시로 정착할 수 있었다. <가버나움>은 그렇게 영화와 구호활동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혹자는 <가버나움>이 제3세계 민중의 가난과 뿌리 뽑힌 삶의 구조적 원인을 외면하고 단지 현상만 훑는다며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비참한 상황과 고통에 직면한 관객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질문은 해석이 아니라 구석에 몰린 상태에서 나오는 반응에 가깝다.
나는 <가버나움>을 학생들과 관람한 후,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부모들이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고 절규하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의 절규에서 진정성을 느끼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진정한 범인은 그들의 비양심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현실일 수 있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가버나움>은 허구물이자 교육물이다. 관객에게 예술을 제시하는 동시에 “당신들이 감히 취향을 논할 수 있는가?”라고 도발한다. 세계는 최악이 되었다. 예술이 예술의 지위를 고수하는 것이 비도덕적일 정도다. 이 끔찍한 세계에선 누구도 고상함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가버나움>은 보여준다. 그런 용기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예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