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1주년 대담 - 시작된 변화, 계속돼야 할 움직임
2019-03-14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임순례 감독·심재명 명필름 대표·한유림 전문위원·한미라 강사
한미라 강사, 임순례 감독, 심재명 명필름 대표, 한유림 전문위원(왼쪽부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하 든든)이 개소 1주년을 맞이했다. 2018년 3월 1일,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이 운영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원하는 든든이 개소한 뒤, 2016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계기로 지난 1년 동안 차분히 토대를 마련하고 영화계 내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및 피해자 지원을 비롯해 실태 조사, 정책 제안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든든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임순례 감독, 심재명 명필름 대표, 상담 담당 한유림 전문위원 그리고 예방 교육을 진행해온 한미라 강사가 한자리에 모여 든든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다. 더불어 ‘영화계 내 성평등 환경 조성’이라는 거시적 목표에 다다르기까지 한국영화계가 풀어야 할 숙제가 무엇인지 꼼꼼하고 차분하게 짚었다.

-먼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하 든든)의 첫 1년에 대한 각자의 총평을 들어보고 싶다.

임순례 감독

=임순례_ 각자 스케줄이 바빠서 일정을 조정해 만난 날이 공교롭게도 지난해 개소한 지 딱 1년 된 3월 1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다. 사실 든든이 문을 열 때는 신고가 어느 정도 들어올지, 사건이 어느 정도 수면 위로 올라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영화계에서 겪은 실상보다는 신고 건수나 내용이 충격적이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영화계에서 든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런 조직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인에게 든든한 힘이 되지 않을까. 그동안 여러 가지 예방 교육을 시행했고, 표준계약서를 작성하고 산별 노조와 협약을 맺는 등 상당히 체계적으로 자리 잡아왔다. 빅 펀칭은 없었지만, 준비를 차분하게 잘하고 있다. 원래 만든 그림대로 잘 가고 있다.

=심재명_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국여성민우회나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민원을 제기하고 신문고를 활용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적극적 협력하에 영화계 내 기구를 만든 것은 처음이다. 대중문화·예술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거의 유일한 기구일 것이다. 2016년 <씨네21>이 진행한 영화계 내 성폭력 관련 연속 대담이나 해시태그 운동 이후 문제의 식을 느껴 시간을 두고 준비해왔다. 물론 여러 시행착오도 겪었고 개선할 문제도 있지만, 책임감을 갖고 차분하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유림_ 신고를 받기 시작했을 때는 사실 영화계 커뮤니티가 너무 협소한 까닭에 신고가 이 정도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면서 용기를 내 연락하는 분이 예상보다 많았다. 미투 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든든을 준비하며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춰놓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좋은 분들이 자문위원으로 함께해주셔서 피해자를 지원할 때 네트워킹도 잘됐다. 그렇지만 영화산업 내 성평등 환경을 조성하려면 앞으로 갖춰나가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든든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자세히 모르는 영화인도 있다. 지난해 첫발을 내딛고 시스템을 갖춰나갔다면, 올해는 좀더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홍보도 하게 될 것 같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한국독립영화협회 등 여러 단체와 더욱 긴밀하게 움직여 실제 사건 발생 시 더 탄탄하게 지원할 것이다.

=한미라_ 초반에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한달에 6~7회 진행했다면, 요즘엔 16~17회까지 한다. 영화판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이 필수라는 점을 인지하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교육이 천지를 개벽시킬 만큼 파급력이 있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다. 교육을 한번 들었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가치관이 확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계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은 남녀간에 발생할 수 있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이 조직은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구성원에게 알려주는 데 의미가 있다.

-소송 지원 사건 중 2건은 역고소와 관련되어 있었다. 모두 피해자가 혐의 없음 판결을 받아 승소했다. 최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2심 판결도 이슈가 됐고, 사회 분위기의 전반적인 변화를 체감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한유림_ 역고소 관련 건의 결과는 미투 운동의 힘이 무척 컸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피해자를 가해자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소하는 사례가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남아 있어서 가해자들이 이를 계속 악용하고 역고소를 남발한다. 하지만 제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피해자들이 폭로할 수밖에 없었고, 미투 운동이 공익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재판부가 이해하고 판결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든든이 또 다른 역고소 건을 지원하고 있다.

심재명_ 성폭력 문제는 사회의식뿐 아니라 사법적 측면의 변화도 같이 이루어져야 해결할 수 있다.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의 경우 2심 결과가 잠재적 피해자에게 힘이 되고, 더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든든은 피해자를 위해 변호사 수임료 등 법적 소송비와 의료 상담비를 지원하고 있다(2018년 2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든든은 총 60건의 법률 지원을, 총 4건의 의료 상담비 지원을 실시했다.-편집자). 혹시 예산상 어려움은 없나.

한유림_ 기본적으로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지침에 따라 운영해야 하는데, 그 기준 자체가 별로 높지가 않다. 피해자 한명이 지원받을 수 있는 액수에 한도가 있고, 미투 이후 2차 피해 등 더 복잡한 부분이 있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법률 시장이 생겼는데, 피해자를 지원하는 변호사들은 업무량에 비해 봉사에 가까운 굉장히 적은 돈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한꺼번에 확 바뀌기는 어렵고, 데이터가 쌓이면 여성가족부가 내린 지침에도 반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든든이 데이터베이스를 잘 모아서 현실을 잘 알리고, 실제 법과 제도를 만들 때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도 올해 여성가족부 기준이 상향 조정되고, 든든 역시 법률 지원 비용을 지난해보다 상향 조정하려고 한다. 피해자 지원은 기존 법과 제도 안에서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다. 문화예술계 관련 법 개정을 논의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구체적인 무언가가 나오면 든든도 의견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현장의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

-영진위가 지원하는 영화 현장 중심으로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제공해왔다. 전반적인 수업 분위기는 어떤가.

한미라_ 교육 대상자들이 성의껏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인다. 다만 교육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종종 강사가 현장을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갑자기 동영상이 재생되지 않는다거나 음성이 지원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 현장 교육은 이틀 전에 신청하거나 갑자기 시간 변경을 요청하는 등 일정 변경도 잦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도 영화를 촬영하다가 제3의 장소로 이동해 교육을 2시간 듣고, 다시 촬영 장소로 가는 것도 힘들 테고. 든든에서 교육 장소를 따로 마련해주면 훨씬 안정적인 분위기에서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유림_ 하나 덧붙이자면, 현장마다 수강생들의 몰입도가 다른데 스탭들의 컨디션에 많이 좌우된다고 한다. 너무 바쁘고 지쳤을 때 수업을 잡으면 자는 경우가 많다더라.

한미라_ 고사 지내는 날 교육을 진행하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같은 날 산업 안전 보건 교육도 받고,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도 받아야 하니 아무래도 듣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임순례_ 제작진이 모두 모여 대본 리딩을 하고, 교육 받고, 고사 이후에 술자리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보니 1시간 이상 교육을 들으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한다. 고사 날 교육을 진행하려면 많이 압축해서 핵심만 짧게 20분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심재명_ 명필름에서 교육을 실시했을 때 이은 대표도 그런 얘기를 했다. 교육이 좋긴 한데 2시간은 너무 길다고, 교육 프로그램을 좀더 정교하게 짜서 1시간 내로 끝내는 게 교육 효과도 더 크지 않겠느냐고. 동영상 중심으로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한미라_ 교육하다 보면 자주 뵙는 분이 생긴다. (웃음) 스탭들은 보통 여러 작품에 참여하니까 1년에 같은 사람에게 대여섯번 같은 내용의 교육을 듣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 예방 교육을 1년에 한번 필수로 듣게 하고, 이미 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끔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임순례_ 지금 나오는 피드백 중 하나가 소위 ‘오야지’ 그러니까 수장들은 수업을 듣지 않고 자꾸 밑에 있는 스탭들만 교육에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위계에 의해 벌어지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각 파트의 수장이 교육을 받는 게 중요하다. 수장이 분위기를 이끌고 팀원을 단속하게끔, 수장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지난해 영화제작 현장, 영화제, 영화 단체뿐 아니라 대학에서도 신청이 6건 들어와 수업을 진행했다.

한미라_ 졸업영화 제작 시즌에 맞춰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신청하더라. 학교에서 영화 이론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영화상의 폭력 재현같은 내용에 관심이 많고 이에 대해 언급하면 만족도가 높다. 그러므로 예방 교육도 교육 대상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해 그 니즈를 어떻게 충족시킬지 고민해서, 하나의 강의안이 아닌 단체나 조직마다 최적화된 여러 버전을 준비할 필요성을 느낀다. 가령 회사에서는 사건 발생 시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법률적인 측면에 관심이 많다.

-그 밖에 영화계 내 성희롱 교육을 진행하며 염두에 둔 이상적인 방향이 있나.

한미라_ 강의 분위기가 의외로 밝아서 좋았다는 분이 있었다.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어둡고 칙칙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이다. 교육 분위기를 좀더 밝게 만드는 건 강사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콘텐츠 자체가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문제제기를 했을 때 적절한 조치가 취해진 좋은 사례가 많이 나오고, 이 부분이 교육 내용에 포함되면 밝고 건강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심재명_ 영진위의 제작지원을 받는 영화의 제작진은 필수적으로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지만, 주류 상업영화나 영진위 지원과 관계없는 프로젝트는 강의를 굳이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또 올해 신생 투자·배급사가 많이 생겨서 투자·배급사와 영화제작사, 기타 단체에 교육을 받으라는 공문을 보냈다. 요즘 회사에서는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지 않나. 영화계에도 제대로 정착하게 하려면 고민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의무화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기회의 다양성, 임금 격차 불균형 해소가 중요

-최근 <씨네21>에서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을 비롯해 흥행 성적도 만족스러웠던 여러 여성영화의 주연배우들이 이후 왕성한 활동을 하지 못한 점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또 다른 것 같다. 2017년부터 영진위에서 집계한 성인지 관련 통계를 보면 수치상으로도 개선되지 않았나.

심재명_ 전에는 여성 중심 작품이 거의 없을 때 가끔 대박난, 아주 특이한 케이스가 있었다. 그래서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쓰백>(2018) 이후 한지민 배우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드라마 <SKY 캐슬> 이후 염정아 배우가 엄청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확실히 인식이 변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젠더 감수성도 높아졌다. 올해는 <말모이>와 <돈>을 시작으로 <걸캅스> <82년생 김지영> <가장 보통의 연애> 등 여성감독이 연출을 맡은 상업영화도 많이 나올 예정이다. 성인지 통계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진행한 포럼 등에서 나온 이야기가 반영된 케이스다. 여성감독 영화와 여성 주연 영화를 수치화해서 발표하고 그 숫자 역시 늘어났다는 건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다. 그런데 이는 합쳤을 때의 이야기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주류 상업영화와 저예산 독립영화로 세분화해 살펴보면 여전히 상업영화에서는 여성감독 수가 훨씬 적다. 지난해 <리틀 포레스트> <미쓰백> <국가부도의 날> 등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주의 시각을 반영한 영화의 수익률이 높아졌다. 훨씬 많은 예산이 들어간 남성 중심 영화보다 여성 중심 영화가 수익률 면에서도 경쟁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런 부분을 계속 계량화함으로써 팩트에 기반을 둔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게끔 자극할 수 있다.

임순례_ 독립영화계에서는 이제 눈에 띄게 여성감독들이 재능을 인정받는데, 상업영화로 매끄럽게 연착륙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불균형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한국은 성별간 편차가 너무 심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결국 배급의 문제다. 전형적인 장르영화가 아닌 작품은 투자나 배급 단계에서 밀린다. 이들이 주류 영화계에 어떻게 안착할 수 있는지 대책을 강구하는 게 우리가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고, 그것이 결국 한국 영화산업을 건강하게 만들어 모두가 사는 길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독립영화를 한다고 해서 재능이 낭비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원하는 영역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영화 스탭 중 고임금을 받는 직군에서 여성이 배척되는 문제도 있다. 2018년 성인지 통계에서 여성 촬영감독은 단 한명도 없었다. 제작부나 연출부에는 그나마 여성이 있는데, 20~30년 전부터 이야기가 나온 기술 분야는 여성이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고임금 분야는 남자가 독식하고, 단순 업무나 지구력이 필요하고 저임금을 견뎌야 하는 분야는 여자들이 더 많다.

심재명_ 인력 분포뿐 아니라 임금 격차 면에서도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 영진위에 20년 만에 처음 생긴 소위원회가 성평등위원회다. 그곳에서 해야 할 역할이 굉장히 많다. 방금 말씀하신 문제를 정서적으로, 주관적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지원사업이나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심사위원의 성별을 일대일로 맞추는 방안 등을 생각할 수 있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벡델 테스트로는 부족하다는 업계의 요구에 따라 해외에서는 새로운 지표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 든든 차원에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해 창작자들이 더 깊이 고민하게 장려하면 좋을 것 같다.

심재명_ 좋은 생각이다. 최근에 영국영화협회(BFI)에서 얼굴에 상처가 있는 빌런이 나오는 영화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기사를 봤다. 안면에 흉터가 있는 사람을 악당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고 이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다. 이렇듯 첨예하게 고민하는 시대다. 더욱 깨어 있는 눈으로, 예민하게 영화를 보고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밖에 넓은 의미의 성평등을 위해 든든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

심재명_ 공공기관인 영진위와 든든의 역할을 구분해야 하는 지점이 있고, 든든은 정책을 제안하는 일까지는 할 수 있다. 올해는 실태 조사를 다시 실시하려고 한다. 결국 이 실태 조사 결과가 제도 마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아직 구현되지 않았지만 성인지 지표를 통합전산망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하게끔 개편하는 것도 제안할 수 있다. 또한 성인지 지표의 사실 확인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내년이 여성영화인모임 20주년인데, 이를 기념해 여성 영화인 사전도 다시 만들 계획이다. 20여년 전에 영화의 탄생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포괄하는 사전이 만들어진 적 있는데, 내년에 만들어질 책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를 다룬다. 여성 영화인에 대한 비평, 통계 자료 등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포함하려 한다. 또한 든든의 자문위원회에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한국독립영화협회·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등의 단체가 있는데, 그들과 만나서 표준근로계약서에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취할 조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한유림 전문위원

한유림_ 든든의 자문위원회 법률 전문가들도 징계와 관련한 부분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표준근로계약서에는 실제 사건이 생겼을 때 막연하게 양성평등기본법이나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을 따른다고 명기돼 있는데, 구체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영화 현장에 그 조항들이 잘 맞아떨어지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부분을 전반적으로 검토해 상반기 중 진행할 예정이다.

임순례_ 각 산업 노조에는 조합과 관계된 내규가 있다. 조합의 성격이나 조합원의 구성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데,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도 자체적으로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 2월 27일 한국영화감독조합 총회가 있었다. 강사 교육을 받은 박현진 감독,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윤정 감독이 1시간 넘게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영화인으로서 업계에서 지켜본 성폭력의 역사와 지난해 조합 내 징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확정됐는지 알리고 앞으로 영화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제시했다. 사회적인 분위기나 든든의 요구 등 여러 가지가 합쳐져 중·지·신(중지(Stop)·지지(Support)·신고(Report)의 원칙)이라는 행동 강령을 만들었다. 특히 위험을 동반한 촬영, 폭력·섹스·성적 접촉·노출이 있는 장면을 연출할 때 어떤 지침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번도 조직 전체가 모여 논의한 적 없는데, 구체적으로 배우와 어떻게 합의하고 촬영본을 관리해야 하는지 초안을 마련했다. 다만 조합원이 관계된 분쟁 발생 시 연락할 곳에 든든, 국가인권위원회, 각 지역 경찰서가 언급되어 있었는데, 한국여성민우회나 한국성폭력상담소도 포함하자고 제안하려다가 잊어버렸다. 지금 나온 최종본에서도 약간의 수정은 필요하다.

-이번 한국영화감독조합에서 공유한 행동 강령은 다른 조직에도 자극을 줄 것 같다.

임순례_ 여성감독들이 주도적으로 초안을 마련했고, 나머지 구성원도 공감했기 때문에 감독조합에서는 가능했던 것 같다. 이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총회 날 좀 놀란 게, 두 감독이 준비해온 내용을 다들 굉장히 집중해서 듣더라. 객석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감독이었는데도 말이다. 촬영현장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 감독의 역할이 크다. 즉, 성평등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감독은 매우 핵심적인 직군이다. 그들이 이렇게 이 문제를 인식하고 상당한 공감적 지지를 보낸다는 점은 굉장히 긍정적인 변화다. 지난해 영화계가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분야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른 문화 예술 조직에서 이 정도로 합의체를 만들어내고 공동의 행동 지침을 논의하는 일이 있었나 싶다. 내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계가 그나마 앞서가는 것 같다. 우리가 선례를 만들면 다른 영역에서 벤치마킹할수도 있고.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영화계가 이렇게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백래시(사회현상에 반발하는 심리 및 행동을 이르는 말) 현상도 상당 부분 관측된다. 이것이 혼재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이 있다.

임순례_ 영화에 대해 관객이 이중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영화니까 영화적 설정으로 받아들여야지 왜 예술작품에까지 이렇게 간섭하느냐는 식의 반응이 있다. 영화는 결국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문화적 지표다.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말을 쓰는지, 영화에서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에 반영된다. 한국 젊은 여성의 젠더 감수성은 세계적으로 봐도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그 간극을 점점 메워가야 한다. 그들이 주소비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옳은 방향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을 죽이고 성차별적 언어를 쓰던 감독들도 이제는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는 지속될 것이다.

한미라 강사

한미라_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대상자 중에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판결이 타당하지 않다고, 강간이 아니고 불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강의하던 중 어떤 분이 부부간에도 강간이 성립하느냐고 묻길래 “네, 성립됩니다”라고 순진하게 대답해줬다.(일동 폭소)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더라. 이 얘기를 주변에 했더니 그게 공격하는 질문이라고, 일종의 테스트를 한 거라고 알려줬다. 강사가 밝고 명랑하게 교육하니 자신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강사로서 체감하기에 그렇지는 않았다. 이 교육은 오래도록, 끝까지 가야 한다.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반부에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 등 이슈가 있어 대상자들이 긴장감 있게 교육을 들었는데, 요즘은 그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이건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라 다른 강사들의 생각은 좀 다를 수 있다.

임순례_ 정치권의 안희정, 스포츠계의 조재범 등 상징성을 가진 인물들이 있다. 영화계에서는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 배우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구속되지 않고 아무런 사법적 처벌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해외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처리가 안 될 수 있나? 안희정 판결이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상징적인 무언가가 자리 잡고 이정표를 찍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불안정하다. 무고죄로 맞고소하거나 2차 가해를 하거나 백래시적 여론이 생긴다거나.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심재명_ 성평등 운동이 어떤 운동보다도 어려운 것 같다. 가장 바람직한 민주 사회를 이루려면 젠더 감수성을 가진 환경이 필요한데, 참 요원하고 어려운 문제다. 영화 속 여성 재현 등 제작 측면에서는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구체적인 성폭력 사건에 이르렀을 때 피해자가 용기를 내고,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고, 2차 피해도 받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가 정말 어렵다. 길고 지난한 싸움을 위해 함께 든든하게 연대하고 도와야 한다.

한유림_ 미투 운동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이 이후가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큰 사건에서 합당한 판결이 나오는 재판부의 변화와 사회적으로 젠더 감수성이 정착하는 분위기가 같이 가야 하는데, 완전히 그러지는 못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판결에 모두가 납득하지 못하거나 오달수 배우에게 동정 여론이 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가장 흉악한 형태의 강간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면서,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젊은 세대의 의식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계 안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폭력이 있다. 가해자 혹은 피해자쪽에서 잘 몰라서 벌어지는 일도 상당수다.

임순례_ 한국영화감독조합 총회에서 나온 얘기가 있다. 홍보 활동 중 감독이 홍보사 직원에게 불편한 언행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또 남성감독과 여성 기자가 단둘이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홍보·마케팅, 기자 중 경험이 적은 어린 친구들이 그런 가해에 노출될 수 있다.

심재명_ 영화마케팅사협회에 예방 교육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아직 받지 않았다.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좀 바뀔 텐데.

한유림_ 그래서 든든 같은 커뮤니티 안에 어떤 구심점이 있는 게 필요하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애정을 가진 사람이면 가르쳐줄 수 있다. 상대방이 정말 몰라서 그런다며 물어보면 대답을 잘해줄 수 있는데, 인터넷에서 익명의 누군가와 얘기하다 보면 딱히 애정이 없으니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르냐”, “이게 뭐? 왜?” 하면서 싸우게 되지 않나. 여러모로 지금이 과도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2019년을 맞이해 든든의 활동 계획을 간단하게 소개해주기 바란다.

심재명_ 강사들의 재교육, 전문가들의 멘토링 프로그램 마련 등이 올해 사업 계획안 얘기할 때 언급된 사안이다. 그리고 든든에서 의료 상담, 법률 소송 등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아직 많은 사람이 모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때 영진위와 함께 포럼도 진행했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든든의 지원 내용을 알리는 브로슈어도 배포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든든을 어떻게 홍보할지,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계속 논의하고 있다. 또 개소 1주년을 맞이해 박찬욱 감독, 문소리·한지민·천우희·한예리 배우 등 많은 영화인이 응원 동영상을 찍어주셨다. 3월 말쯤 SNS 등을 통해 릴리즈할 수 있을 것 같다.

● 한국영화감독조합 중·지·신 행동 강령

중지(Stop)·지지(Support)·신고(Report)의 원칙 – 조합원이 성적 괴롭힘 행위를 인지하거나 목격할 시 즉각 행위를 멈추게 하고, 피해자나 문제제기한 사람 편에 서는 발언과 행동을 하며, 신고할 책임이 있다. ‘신고’는 제작부서의 담당자를 통해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경찰 등의 공적 기관과 연계한 공정한 사건 처리 절차가 시작되도록 공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영화현장에서의 ‘성적 괴롭힘’

● 고용 관계 혹은 업무상 수혜 관계에 있는 윗사람이 성적인 요구나 애정 공세를 조건으로 업무상 이익, 불이익을 결정하는 행위.

● 성차별적이거나 폭력적인 언어, 행위가 일상적으로 허용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

● 성적 괴롭힘에 관하여 피해 사실을 신고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업무상의 불이익을 주거나 사적인 앙갚음을 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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